[추석 톡톡]“취업준비 3년째… 친척들 보기 부담돼 고향가기 싫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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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더 바빠 밤샘 근무… 가족과 연휴는 남의 얘기”

《 추석이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처럼 추석은 풍성함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추석이 모두에게 마냥 반갑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사 준비를 해야 하는 주부, 귀경길 교통 정체를 견뎌야 하는 가장, 친척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취업준비생과 미혼의 청춘에게 추석은 피하고 싶은 날일 수도 있습니다. 추석 연휴에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죠. 여러분에게 추석은 어떤 날인가요? 추석을 앞둔 시민들의 진짜 속마음을 들어봤습니다. 》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기대된다 vs 부담스럽다”

―1년 반 동안 취업준비생 신분이었다가 올 상반기 대기업에 취직했어요. 작년 추석만 해도 친척들 얼굴 보기가 부담스러웠는데 올해는 당당하게 친척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추석에 가장 기다려지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추석 상여금입니다. 170만 원을 받는데 엄마에게 일부 드리고 나머지 돈으론 제가 멜 좋은 가방 하나 사고 싶어요. 학생 때 쓰던 걸 그대로 들고 다니고 있었거든요.(26·여·회사원)

―이번 추석엔 세탁소 문을 잠시 닫고 아이들과 단양으로 여행갑니다. 큰 형님 집에 내려가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한결 가볍군요. 형님 집이 부산인데 사실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어휴, 엄청 스트레스였죠. KTX 표는 어찌나 금방 매진되던지…. 매번 결국 차로 내려갔지만 그때마다 12시간씩 운전하니 중간에 화장실도 못 가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10년 동안 추석 때면 치르던 그 전쟁통을 올해는 피할 수 있겠네요.(57·세탁소 운영)

―3년간 행시 재경직을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은 2차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고요.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살고 있는데 추석 당일엔 본가에서 하룻밤 자고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을 것 같아요. 고시촌 가게들도 명절에는 대부분 문을 닫거든요. 이번 추석은 지난 설날보다 조금 여유가 있어요. 지난 설에는 1차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어 집에도 못 갔는데 이번 명절은 2차 시험 끝나고 발표를 기다리니까요. 그렇다고 추석이 썩 반갑진 않아요. 친척들이 “올해는 될 것 같니”라고 물어보거든요. 제게 추석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단 하루 쉴 수 있는 날일뿐입니다. 기대되진 않아요.(25·여·고시생)

―미혼이라 아직 시댁 스트레스는 없어요. 고모와 외숙모들이 많아서 제가 음식 만드는 걸 도울 일도 없고, 직장도 있으니 취업 스트레스도 없죠. 그런데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기만 하면 꼭 “만나는 남자는 있느냐”고 물어봐요. 전에 결혼 얘기까지 나왔다 깨진 남자친구가 있었거든요. 엄마가 벌써 얘기를 했는지 친척들이 다 알고 있더군요. 그 뒤로 다들 나서서 선보여 주겠다고 하고…. 제 나이가 결혼하기 늦은 나이도 아니잖아요. 제가 알아서 할 텐데. 다들 그냥 모른 척 넘어갔으면 좋겠어요.(34·여·회사원)

“추석이 평소보다 더 바빠”

―대형마트 가정용품 코너 가판대에서 물품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연휴 4일 중 추석 당일만 쉬고 나머지 3일은 출근해요. 추석이 대목이라 오후 11시까지 일하고 다음 날 오전 출근하는 스케줄입니다. 올해는 추석 때 가족끼리 못 지낼 것 같네요. 가족들은 큰집이 있는 전주로 내려가고 나는 여기서 일할 계획입니다. 어쩌다 한 번 있는 명절을 가족들과 못 지내니 아쉬워요. 친척이 많아 음식도 다 같이 하기 때문에 부담도 크지 않았는데 말이죠.(54·여·대형마트 근무)

―추석 때는 평소보다 택배 물량이 30%가량 늘어납니다. 제가 맡은 구역에선 보통 하루에 200∼210개 배달하는데, 명절 때면 250∼300개까지 늘죠. 추석 직전 주엔 300개를 넘고요. 배송물품은 과일, 햄, 참치, 치약선물세트 등 다양합니다. 보통은 오후 6시면 일이 끝나는데 추석 직전 열흘간은 오후 11시 넘게까지 일합니다. 쉴 틈 없이 배송이 이어지니 가끔 다른 물건을 가져다 놓거나 배달을 건너뛰는 식의 실수를 할 때도 있어요. 바쁜 일 모두 끝내고 추석 당일엔 저도 가족들과 함께 푹 쉬고 싶습니다.(46·택배기사)

―명절마다 조상님 여덟 분을 모시는 차례상을 차립니다. 시누이 가족까지 합하면 친지는 15명 정도 모여요. 제가 맏며느리고 밑으로 동서가 한 명 있는데 동서는 전만 부쳐오고 나머진 다 제가 준비하죠. 혼자 하려니 추석 2주 전부터 미리 장을 다 봐 놔야 해요. 비용도 적지 않게 들죠. 솔직히 서운한 감정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남편이나 다른 가족은 음식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으니 남들 시킬 바에 그냥 제가 다 합니다. 지금은 다 내려놓았어요. 내가 맏이니까 해야 한다고, 동서가 전이라도 부쳐오는 게 어디냐고 생각하고 있어요.(56·여·병원 근무)

―본가와 처가가 떨어져 있어 매번 고생입니다. 올해는 주말이 끼어서 연휴가 짧잖아요. 본가가 경기 화성이고 처가가 경남 창원이에요. 서울에서 화성 들렀다가 창원으로 가려니 운전시간이 오래 걸리죠. 피곤한 길이지만 본가만 가면 가족들이 서운해 할 수도 있잖아요. 저도 당연히 두 곳 다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추석 직후 해외파견을 가게 돼 3년간 한국을 떠나요. 가기 전 조금 고생하더라도 친척들 다 만나 뵙고 안부인사 드릴 계획입니다.(39·공기업 근무)


“명절 같지 않은 추석”


―서울역 앞에서 콜밴을 10년째 하고 있어요. 짐 많은 외국인들을 태우거나 백화점 택배, 이삿짐 등을 옮겨요. 안 그래도 불경기인데 명절 되면 더 일거리가 없어요. 사람이 없거든요. 차라리 명절이 없는 게 나아요. 연휴 4일도 너무 길고, 하루만 있어도 충분해요. 어차피 가족들이 다 모이는 것도 아니거든요. 아들 딸들은 다 외국여행 간다고 하지, 친척들도 각자 바쁘지…. 한 번에 모이기 힘들어요. 어쩌겠어요? 추석 당일엔 집에서 잠이나 자고 나머지 날은 나가서 돈 벌어야죠.(54·콜밴 운전자)

―추석 뭐 별거 있나. 같이 밥 먹고 이러는 거지. 지금 혼자 살고 있는데 다행히 나는 늙어서도 계속 고압전선 설치 등 내가 가진 기술로 일을 할 수 있어서 애들한테 손 벌리지 않고 있지요. 추석 때는 아들과 며느리가 하루 와서 반찬 같은 거 해오고, 나는 다음 날 부천에 있는 형한테 갑니다. 형네가 천주교 신자라서 차례상 간소하게 차려놓고 기도문을 읽어요. 제사도 집에서 따로 안 지내겠다, 며느리한테 식사 같은 것도 부탁 안 하고 있겠다…뭐 그래서인지 요새는 추석이 추석 같지도 않네요.(71·고압전선 설치 기능공)

―명절엔 항상 성남에 있는 친척집에 갔는데 이번엔 엄마가 가지 말래요. 이제 고등학생이고 중간고사도 10월 13일부터라 얼마 안 남아서요. 학원도 추석 연휴 때 계속 수업을 하고요. 가족들은 친척집에 가고 저는 집에 혼자 있거나 학원에 갈 것 같아요. 엄마가 해놓고 간 밥을 먹거나 라면 끓여먹겠죠. 공부 별로 안하고 집에서 놀 것 같은데…. 그래서 사실은 혼자 있게 돼 좋기도 해요.(17·여·고교생)

―인심이 참 각박해졌어요. 지난해 추석 때 충청도에서 역귀성하는 노부부를 태운 적이 있지요. 자식들 주소 두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강남 쪽이었어요. 처음엔 아들네 집으로 갔는데 그 집에서 “우리 집 말고 딸네 집으로 가라”며 쫓아냈다고 하더군요. 다시 딸네 집으로 모셔갔는데 거기선 아들네 집으로 가시라며 거부했다고 하고요. 할 수 없이 두 분을 파출소로 모셔드려야 했죠.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지는 못할망정 찾아온 부모를 쫓아내는 세상이 된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번 추석엔 부디 그런 손님을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70·택시운전사)

오피니언팀 종합·임세희 인턴기자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추석#취업#역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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