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여행칼럼) 일본 오사카, 도톤보리의 철학자

  • 입력 2015년 9월 17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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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빴다. 이른 아침, 방안에 울려 퍼지는 알람소리. 난 분명 잠에서 깼는데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면 곧바로 몸을 일으켜야 할 테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다시 분주함으로 빠져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쁠 때가 좋을 때라는 말처럼 허울 좋은 소리도 없었다. 그즈음 난 무엇 때문에 바쁜지도 모른 채 시간을 분으로 쪼개며 일상을 채워가고 있었다.

칼럼니스트·포토그래퍼 감성사진사 이두용


지친 일상 : 도피처를 찾아서

오사카를 선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말 10초도 안 된다. 여름휴가 날짜를 정하고도 그게 언제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며 힘든 오늘을 견뎌낸다는데 나는 “내일부터 여름휴가네? 뭐 할 거야?”라는 직장 상사의 질문을 받고 나서야 내 휴가를 알아차렸다.

“글쎄요. 어디 좀 다녀오려고요” 멋쩍은 대답은 다른 질문을 끌어들였다. “어디 좋은데 가나보네” “아. 일본, 오사카에 며칠 다녀올 생각이에요” 둘러댄다는 게 일이 그렇게 됐다.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컴퓨터를 켜고 오사카행 비행기를 검색했다. 한국에 있으면 휴가 중에도 왠지 전화로 업무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미리 예약을 안 했으니 항공권 가격은 터무니없었다. 어차피 비싸게 구입할 거 다음날 아침 출발하는 비행기를 선택해서 결제 버튼을 눌렀다.

다음 날 어스름이 거치기 전 공항버스에 올랐다. 집에서 공항까지 향하는 한 시간 정도의 시간, 오사카에서 머물 숙소를 검색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예약도 마쳤다. 잠잘 곳을 당일에 예약해본 건 처음이다.

‘아무리 계획에 없었다지만, 나도 참 대단하다.’ 비행기에 오르고 바로 잠에 들었다. 멀지 않은 거리, 길지 않은 비행시간인데 긴장이 풀렸는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도톤보리의 분주함과 대조되는 오사카 명물 구리코 간판>
<도톤보리의 분주함과 대조되는 오사카 명물 구리코 간판>


굿모닝 : 오하요 고자이마스!

‘내가 여기 왜 왔지?’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질문을 떠올렸다. 어딘가를 꼭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간절히 가고 싶었던 곳도 없었다. 여름휴가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그저 정신을 빼놓고 살다보니 휴가일에 도달해 있었던 것뿐.

숙소에 들어가 첫날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사실 숙소 근처 마트에서 그날 저녁까지 먹을 것을 구입해서 들어갔다. 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먹지는 못했지만. 외출할 마음도 없었거니와 이상스레 잠이 쏟아져 숙소에 발을 들이자마자 침대의 포옹에 못 이긴 척 ‘폭~’하고 안겨버렸다.

문제는 일어나 보니 너무 이른 새벽이었다는 것. 새벽 3시를 갓 넘긴 시각 눈이 떠졌다. 그리고 또다시 ‘여기가 어디지? 내가 여기 왜 왔지?’를 반복하다가 TV를 켜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긴 시간 솜뭉치로 꽉 틀어막아 놓은 것 같던 머릿속이 서서히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잘 왔다. 오사카!” 순간 입 밖으로 나긋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오사카의 태양은 부지런했다. 오전 6시가 채 되기도 전에 창밖이 훤했다. 최대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산책을 나왔다. 몸 안을 뽀독뽀독 닦아낸 양 상쾌한 기분이 들어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장사를 준비 중인 일본 화과자가게의 주인장. 자신의 집 앞은 물론 거리 곳곳까지 청소하고 있는 빗자루질의 달인 할아버지. 심부름을 다녀오는지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양팔에 비닐봉투를 들고 걸어가는 꼬맹이.

출근을 하는 건지,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가는 건지 화장을 곱게 하고 잘 차려입은 뾰족구두 아가씨까지. 우리네 아침 풍경을 닮은 그들의 삶이 상쾌한 내 산책을 반겨줬다.


뫼비우스의 질문 : 행복한가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다보니 도톤보리(道頓堀)다. 열 번도 넘게 와봤을 오사카인데 도톤보리의 느낌은 늘 새롭다. 어둠이 깔리기가 무섭게 고요가 거리를 채우는 일본 도심의 한산한 밤풍경. 하지만 도톤보리는 언제나 예외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 오사카 야경>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 오사카 야경>


별들이 소근댄다는 화려한 홍콩의 밤에 비할 바야 아니지만, 도톤보리의 불야성은 수도인 동경의 명소들보다 늘 밝은 느낌이었다. 내가 찾아간 날만 유독 그랬을까. 휴일 아침도 아닌데 도톤보리 거리가 조용했다.

고요함에 이끌려 구리코(グリコ, glico) 간판까지 걸었다. 구리코는 일본의 식품 회사로 주로 과자 종류를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이 회사의 마스코트 격인 마라토너의 네온사인 간판이 도톤보리강을 중심으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있다.

마라토너가 오사카 시내를 돌아 이곳으로 골인한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 도톤보리뿐 아니라 오사카 최고 명물이다. 거리 한편 그리코 간판이 잘 올려다 보이는 곳에 앉았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뒤 양팔을 들고 결승라인으로 골인하는 캐릭터의 표정이 밝다. 간판엔 경쟁자가 없으니 그가 몇 등인지 알 수 없다. 사실 그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열심히 달렸고 자신이 이뤄낸 결과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지금의 난 행복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왜 바쁜지조차 때로 생각할 겨를이 없는 나의 분주함. 내게 즐거움을 주고 있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행복한 순간을 위해 지금의 고통과 처절한 수고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행복이란 문구가 정겨운 한국식당>
<행복이란 문구가 정겨운 한국식당>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무언가가 채워졌다 한들 나중이 과연 행복할까. 행복은 없던 것이 생기고, 못했던 것을 해내고, 풀리지 않던 것을 해결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조건을 부여하지 않아도 지금의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어야 그 어떤 좋은 결과가 와도 혹은 오지 않아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롯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겠다는 생각. 자다가 일어나 씻지도 않은 채 파자마 바람으로 산책을 나온 난 그 이른 아침 도톤보리의 철학자가 되어 있었다.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오랜 문제의 해답을 얻어낸 순간이었다.

없던 전환점을 돌아 : 일상

꿈을 꿨다. 4박5일간의 긴 꿈. 밤새 돌리는 기계도 때로는 멈춰놓고 기름칠을 해야 한다. 닳아 없어지는 소모품도 적절한 타이밍에 교체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람인데. 밤낮없는 수고가 괜찮을 리 있을까.

5일간 오사카에 머물면서 한 거라곤 매일 아침 산책이 전부였다. 낮엔 숙소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근처 동네 식당에서 해결했다. 고작 4박5일인데, 숙소 인근만 들락거렸더니 그 시간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다가 나중엔 대화를 나눴다.

보통 여행을 하면 더 많은 명소를 다니기 위해 체류기간을 늘리곤 했는데, 이번엔 동네 주민들과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장시간 이곳에 남고 싶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선 창밖 풍경을 내다봤다. 신기하리만큼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기 싫을 만큼 분주했던 일상이 기다리고 있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있었다. 설렜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삶인데. 난 계획에도 없던 여행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전환점 하나를 돌았다. 내가 하는 어떤 중요한 일보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실제 그 일을 해내는 능력만큼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잠깐의 여행 동안 머리에서 계속 되새김을 했다.

사실 그 어떤 깨달음도 자신의 내면 외에는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업무의 양은 그대로였고 시간이 갈수록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난 웃음이 늘었고, 다소 불합리한 상황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도톤보리 철학자의 개똥철학이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일상에 제법 배어있는 건 감사한 일이다.


COLUMNIST 이두용

월간 아웃도어 편집장, 뮤지션으로 10년 넘게 살면서 책·음반·여행사진을 찍으며 사진에 입문했다.

2009년 중동 요르단 5개 지역에서 사진전과 함께하는 거리 축제를 열었다. 영국 공군이 주최하는 사진전과 심장병 어린이 기금마련 국제행사에 초청 전시했다.

EBS <세계테마기행> ‘요르단 편’ 진행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중이다. 저서로는 <오늘부터 행복하다>(부즈펌)이 있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amede.net), 취재 김수석 기자(kss@egihu.com) 촬영 이두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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