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정신 상징 ‘신림 9동 고시촌’ 역사 한눈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6일 16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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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3 엄마를 위해 성공하자! 합격하자!’

권영성 헌법학원론, 이준구 미시경제학 등 두터운 고시 기본서들 사이로 검정색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쓴 포스트잇이 책상에 붙어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정책학 수험서에는 페이지마다 요점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1990년대 행정고시를 준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에 익을 풍경이다.

15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의 ‘신림동 청춘-고시촌의 일상’ 전시회는 신림동 고시원의 내부를 실제와 똑같이 복원한 책상부터 식당 식권까지 고시생들의 고단한 일상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고시생들이야 식당, 고시원, 독서실만 오가다보니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위로 받고 싶은 거죠.”(녹두거리 토크바 종업원)

고시촌에는 미래를 위해 청춘을 유예한 젊은이들의 고독과 좌절도 진하게 녹아있다. 전시장 한켠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시촌의 토크바 사진이 대표적이다. 토크바는 말 그대로 종업원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곳. 옆자리의 수험생조차 경쟁자일 수밖에 없는 삭막한 현실에서 소통에 목마른 고시생들의 자화상이다.

2008년 로스쿨 도입 전까지 입신양명의 통로이자 헝그리 정신의 상징이었던 신림 9동 고시촌. 1960년대 강제이주에 따른 철거민들의 삶의 터전이던 이곳은 1975년 서울대 이전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한쪽에서 체제의 중심에 들어가기 위해 고시공부에 청춘을 불태우고 있는 동안 근처 녹두거리에서는 군부독재에 맞선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전시장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녹두거리를 가득 메운 서울대생들의 시위 사진이 게시돼 있다.

2017년 사법시험 폐지로 수험생들이 밀물같이 빠져나가고 있는 고시촌의 현재 모습도 담겼다. 이들이 떠난 빈 자리를 취업준비생과 저임금 노동자 등 다양한 1인 가구가 채우면서 고시촌의 외형도 바뀌고 있다. 수박, 바나나 등 각종 과일을 1인분씩 잘라서 파는 가게를 촬영한 전시 사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1월 8일까지 관람료는 무료. 02-724-0274

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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