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손글씨 배우던 시절의 순수함이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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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작가 퍼포먼스作 ‘1000명의 책’ 본보기자 참가기

안규철 작가의 릴레이 퍼포먼스 작품 ‘1000명의 책’ 첫 참가자로 동아일보 손택균 기자가 작품 속에 들어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원고지에 필사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전시실 입구 스크린에 중계되는 ‘글 쓰는 손’ 이미지. 1시간을 꼬박 앉아 4장을 겨우 채웠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안규철 작가의 릴레이 퍼포먼스 작품 ‘1000명의 책’ 첫 참가자로 동아일보 손택균 기자가 작품 속에 들어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원고지에 필사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전시실 입구 스크린에 중계되는 ‘글 쓰는 손’ 이미지. 1시간을 꼬박 앉아 4장을 겨우 채웠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널찍한 나무책상 하나가 꼭 들어찬 하얀 방. 문을 닫았다. 하얀 벽처럼 조용하다. 독서받침대 위 책 한 권, 검정 펜 세 자루, 원고지 한 묶음이 의자 앞에 놓인 전부다. 책 첫 페이지를 열고 펜을 골라 원고지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K가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마을은 깊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

내년 2월 1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현대차 시리즈 2015: 안규철-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그렇게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으로 첫머리를 열었다. 기자는 14일 오후 전시 프리뷰를 통해 ‘글 쓰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퍼포먼스 작품 ‘1000명의 책’ 첫 페이지에 참여했다. 안규철 작가(60·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아름다움이 삶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손으로 글씨를 배우던 어린 시절 순수한 모습의 흔적은 나이 든 뒤에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없는 그리운 것’을 메모해 8600개의 못에 거는 관객 참여 작품 ‘기억의 벽’ 앞에 선 안규철 작가.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지금 없는 그리운 것’을 메모해 8600개의 못에 거는 관객 참여 작품 ‘기억의 벽’ 앞에 선 안규철 작가.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작은 병원 의사였던 아버지는 매일 저녁 책상에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등불 아래서 16절 갱지에 펜으로 글을 옮겨 적었다. 외연으로부터 물러나 온전한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이미지로 각인됐다.”

설치작품 8점 중 고갱이인 이 작품은 미술관 홈페이지(mmca.go.kr)를 통해 1000명의 참가 신청을 받는다. 참가자는 약속한 시간에 작품 속으로 들어가 1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주어진 책 내용을 원고지에 옮겨 쓴다. 안내 직원은 “서둘러 많이 쓸 필요는 없지만 계속 써야 한다. 중간에 오래 멈추면 안 된다. 화장실에도 갈 수 없다”고 일렀다.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써본 경험은 십수 년 전 대학 시절 연애편지 이후 없었다. 묘한 긴장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첫 칸을 채웠다. 사각사각. 펜촉에서 옮아간 잉크가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번져 하나하나 문장으로 앉았다. 글씨를 옮겨 쓰는 손 모습은 전시실 밖 스크린에 생중계된다. 펜과 종이의 마찰음도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관람객은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위로 뚫린 창을 통해 참가자의 글 쓰는 뒷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본다. 안 교수가 꼬마 때 바라본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한 1000개의 오마주인 셈이다.

참가 예약은 2개월분만 마감됐다. 누구나 선착순으로 신청할 수 있다. 앞사람이 그친 자리부터 이어 적으면 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상의 ‘날개’, 허먼 멜빌의 ‘백경’ 등이 옮겨 써줄 손을 기다리고 있다. 이 5개월간의 릴레이 퍼포먼스는 필사본 원고를 책으로 묶어 인쇄해 해당 소설에 참여한 사람에게 발송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안 교수는 “최대한 여백을 비워내 관람객을 수동적 구경꾼이 아닌 능동적 공동창작자의 위치로 끌어올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름 8m, 무게 35t의 콘크리트 공 구조물 ‘침묵의 방’은 작가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무것도 없이 빛으로만 채워진 공간. ‘이게 뭐야’ 하고 들어갔다가 훅, 자기 자신의 숨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소리. 부끄럽게 아름답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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