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널찍한 나무책상 하나가 꼭 들어찬 하얀 방. 문을 닫았다. 하얀 벽처럼 조용하다. 독서받침대 위 책 한 권, 검정 펜 세 자루, 원고지 한 묶음이 의자 앞에 놓인 전부다. 책 첫 페이지를 열고 펜을 골라 원고지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K가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마을은 깊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
내년 2월 1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현대차 시리즈 2015: 안규철-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는 그렇게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으로 첫머리를 열었다. 기자는 14일 오후 전시 프리뷰를 통해 ‘글 쓰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퍼포먼스 작품 ‘1000명의 책’ 첫 페이지에 참여했다. 안규철 작가(60·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아름다움이 삶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손으로 글씨를 배우던 어린 시절 순수한 모습의 흔적은 나이 든 뒤에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작은 병원 의사였던 아버지는 매일 저녁 책상에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등불 아래서 16절 갱지에 펜으로 글을 옮겨 적었다. 외연으로부터 물러나 온전한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이미지로 각인됐다.”
설치작품 8점 중 고갱이인 이 작품은 미술관 홈페이지(mmca.go.kr)를 통해 1000명의 참가 신청을 받는다. 참가자는 약속한 시간에 작품 속으로 들어가 1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주어진 책 내용을 원고지에 옮겨 쓴다. 안내 직원은 “서둘러 많이 쓸 필요는 없지만 계속 써야 한다. 중간에 오래 멈추면 안 된다. 화장실에도 갈 수 없다”고 일렀다.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써본 경험은 십수 년 전 대학 시절 연애편지 이후 없었다. 묘한 긴장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첫 칸을 채웠다. 사각사각. 펜촉에서 옮아간 잉크가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번져 하나하나 문장으로 앉았다. 글씨를 옮겨 쓰는 손 모습은 전시실 밖 스크린에 생중계된다. 펜과 종이의 마찰음도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관람객은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위로 뚫린 창을 통해 참가자의 글 쓰는 뒷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본다. 안 교수가 꼬마 때 바라본 아버지의 뒷모습에 대한 1000개의 오마주인 셈이다.
참가 예약은 2개월분만 마감됐다. 누구나 선착순으로 신청할 수 있다. 앞사람이 그친 자리부터 이어 적으면 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상의 ‘날개’, 허먼 멜빌의 ‘백경’ 등이 옮겨 써줄 손을 기다리고 있다. 이 5개월간의 릴레이 퍼포먼스는 필사본 원고를 책으로 묶어 인쇄해 해당 소설에 참여한 사람에게 발송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안 교수는 “최대한 여백을 비워내 관람객을 수동적 구경꾼이 아닌 능동적 공동창작자의 위치로 끌어올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름 8m, 무게 35t의 콘크리트 공 구조물 ‘침묵의 방’은 작가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무것도 없이 빛으로만 채워진 공간. ‘이게 뭐야’ 하고 들어갔다가 훅, 자기 자신의 숨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소리. 부끄럽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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