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시선]대법원의 바람직한 역할을 생각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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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권영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 긴즈버그 대법관 방한은 최고 법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미 연방대법원은 우리 대법원의 법령해석기능과 헌법재판소의 헌법판단기능을 모두 가진다.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선고된 총 864건의 연방대법원 판결 중 헌법판단 판결은 285건으로 33%에 그쳤다. 나머지는 우리 대법원이 담당하는 법령해석 관련 사건인 셈이다. 묵비권과 변호사 선임권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한 피고인의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미란다 판결, 부당한 압수·수색으로 얻는 증거의 증거능력을 배제한 판결,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책임을 제한해 언론자유를 보장한 판결 등 미 사회를 변화시킨 주옥같은 판결은 대부분 법령해석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 대법원도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요건에 관한 판결, 여성도 종중 구성원이라는 판결,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허가기준 판결처럼 법령해석을 통해 사회를 바꾸고 있다. 이런 법령해석이 신중하고 올바르게 이뤄져야 사회가 더 바람직하게 발전한다. 그러므로 대법원이 본연의 역할을 잘 수행할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미 연방대법원이 연간 약 80건만 처리하는 반면 우리 대법원은 3만6000건이 넘는 사건 속에서 신음한다. 그중 전원합의체 판결은 약 20건에 그친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법원의 법령해석기능은 정상 작동할 수 없다. 피해는 결국 국민 몫이다.

대법원의 법령해석기능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이 전제조건이다.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대법관들만으로 구성된 대법원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사회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 어렵다. 진정한 다양성은 법률 문제를 바라보는 가치관과 시각의 차이에서 나온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 논의는 이를 염두에 둬야 한다.

아무리 다양한 대법관들로 구성된 대법원도 연간 3만6000건이 넘는 사건 앞에서는 법령해석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제는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개인과 직역의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핵심은 헌법이 부여한 대법원의 법령해석기능 정상화에 있다. 시간과 기회가 많지 않다. 제19대 국회가 입법적으로 결단해야 할 때이다.

권영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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