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외환당국 A 씨의 ‘換亂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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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경제부 차장
박용 경제부 차장
7년 전 9월의 캄캄한 밤이었다. 2008년 9월 15일 세계 4위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소식이 전해졌다. 며칠 뒤 한국은행 출입기자들은 저녁식사를 겸해 이성태 당시 한은 총재를 만났다. 대화 주제는 온통 미국발(發) 경제위기의 먹구름에 쏠렸다.

“말하자면 이게 소방서에 큰불이 난 건데….” 이 총재는 말을 아꼈다. 달러를 찍어내는 막강한 발권력과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월가가 있는 미국이 위기의 진앙이었으니, 태평양 건너 한은 총재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후 캄캄한 시골길을 전조등도 없이 한참을 달려야 했다.

위기는 불안을 먹고 자라고 투기 세력은 그 틈을 노린다. 그해 7월부터 각종 위기설이 한국 경제를 흔들었다. 당시 위기설에 대응하는 업무를 맡았던 외환당국 A 씨의 일지는 이 무렵 시작됐다. 그는 2008년 7월 ‘9월 위기설’부터 이듬해 ‘3월 위기설’까지 한국 경제를 뒤흔든 각종 위기설과 당국의 대응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의 일지에는 보도자료 배포와 기자설명회 15번, 국제신용평가사 보고서 정정 요청 4번, 해외언론 면담과 기고 12번 등 약 8개월간 총 36번의 위기대응 기록이 남아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고 기록한 그 나름의 ‘환란(換亂)일기’였다.

2008년 9월 말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약 2400억 달러로 세계 6위였다. 외국은행 지점들의 외화 차입이 꽤 있었지만 2223억 달러 유동외채(만기 1년 이내의 장단기 외채)가 한꺼번에 상환 요청이 들어와도 갚고 남을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2008년 초 고환율 정책으로 달러를 소진한 점,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외 개방형 경제구조, 은행들의 외화 차입과 막대한 가계부채 등 한국 경제의 구조적 약점이 ‘한국 때리기’에 이용됐다.

A 씨가 더 힘들었던 건 한국 경제에 대한 불신이었다. 정부가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갑자기 백기를 들었던 1997년 외환위기의 트라우마였을까. 국내외 여론과 시장은 당국의 발표보다 근거가 미약한 작은 외신 보도에 더 휘둘렸다. 한국 경제를 뒤흔든 ‘제2의 외환위기설’은 그해 10월 30일 한은과 기획재정부가 나서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하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A 씨는 요즘 7년 전 악몽을 떠올린다. 미국이 9년 만에 금리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중국 경제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최근 한 외신이 글로벌 IB인 모건스탠리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한국을 위안화 변동에 취약한 ‘10개의 문제 통화(Troubled 10)’로 지목했다. 하지만 모건스탠리의 보고서에는 ‘Troubled 10’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중국 위안화 평가 절하가 각국 통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아시아의 싱가포르 달러, 대만 달러, 한국 원화 등이 취약하다는 평가가 있었을 뿐이다. 이에 외신이 ‘Troubled 10’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면서 ‘9월 위기설’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A 씨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세계 경제의 눈은 16∼17일(현지시간) 열리는 미국 공개시장위원회(FOMC)에 쏠려 있다. 미국이 2006년 이후 9년 만에 금리 인상에 나설지가 관심사다. 금리 인상은 세계 경제의 소방서인 미국이 자국 내의 불을 끄고 정상궤도로 다시 진입한다는 선언이다. 신흥시장으로 흘러나온 자금이 달러 강세와 높은 금리를 쫓아 미국으로 역류할 가능성도 높다. 외국인투자가들이 한국 증시에서 11일까지 27일 연속 순매도하고 있지만 세계 6위권의 외환보유액과 41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는 한국 경제는 겉으론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위기들은 ‘맘을 놓을 때가 아니다’라는 다른 교훈을 보여준다. 한국 경제는 미국, 중국 등 대외변수에 휘둘리는 대기업 중심의 수출 의존형 경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등 분야의 한계기업 구조조정도 시급하다. 각종 규제로 서비스업 선진화는 더디다. ‘나만 살면 된다’식 전투적 노사관계의 틀도 바뀌지 않았다. 1100조 원을 넘어선 가계부채, 나빠진 재정 건전성과 성장률은 여전히 아킬레스건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 나빠지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다. 언젠가 미국이 금리를 올리고 세계 경제가 요동치면 단골로 등장할 ‘한국 때리기’ 소재다. 다시 위기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과거 위기가 던져준 숙제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A 씨가 7년 전 환란일기를 다시 꺼내보는 이유다.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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