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소떼가 연 길, 北도발에 막혀도… 8배 훌쩍 큰 남북교역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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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남북경협사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방북한 1차 ‘소떼 방북’ 당시의 모습. 소들을 실은 트럭이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를 건너고 있다. 통일대교는 이날 하루 전에 개통했다. 동아일보DB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방북한 1차 ‘소떼 방북’ 당시의 모습. 소들을 실은 트럭이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를 건너고 있다. 통일대교는 이날 하루 전에 개통했다. 동아일보DB
“탕탕!”

해가 떠오르고 있던 2008년 7월 11일 오전 4시 50분경 금강산 관광지구 인근. 보초를 서고 있던 북한 병사의 총에서 총성이 울리고 곧이어 치마를 입고 있던 53세 중년 여성이 숙소에서 3.3km 떨어진 해변에 쓰러졌다.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다.

남북 관계는 곧바로 얼어붙었다. 북한은 “사망 사고는 유감이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 남측의 진상조사는 불허하며 대책을 세울 때까지 금강산 관광객은 받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금강산 관광은 전면 중단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르면 몇 달, 늦어도 몇 년이 지나면 금강산 관광이 재개될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금강산 관광은 10주년을 약 4개월 앞두고 있었고, 2005년 6월에는 누적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한 뒤 사건 4개월 전에는 승용차 관광까지 실시할 정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개성 관광도 두 차례 시범관광을 거친 뒤 2007년 12월부터 본격 실시돼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선죽교를 보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사건 발생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금강산과 개성 관광은 여전히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터진 사건으로 남북 경협이 중단된 대표적 사례다.

금강산 관광뿐만 아니라 남북 간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개성공단 폐쇄가 거론되는 등 늘 남북 경제협력(경협)은 언제라도 중단될 듯 아슬아슬해 보인다. 하지만 정작 실제 통계를 보면 5·24조치가 시행되는 중임에도 남북 간 교역액은 계속 늘고 있다. 뜨고 지는 때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으로는 성장해 온 셈이다.

16일이면 폐쇄됐던 개성공단이 재가동을 시작한 지 2주년이 된다. 남북 경협의 위태로웠던 역사와, 그럼에도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소 500마리를 몰고 간 1차 ‘소떼 방북’ 당시 정주영 회장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당시 83세였던 정 회장은 4개월 뒤 소 501마리를 몰고 2차 방북을 한 뒤 김정일과 면담했다(왼쪽 사진).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북한 보초병에게 피격 당한 박왕자 씨의 시신이 남측에 인도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지는 모습. ‘박왕자 씨 피격 사건’ 이후 금강산 관광은 여지껏 중단된 상태다(가운데 사진). 2013년 4월 정부의 개성공단 체류인원 전원 철수 결정에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공단에 남아 있는 물품을 옮기는 모습. 개성공단은 그해 9월에야 다시 가동됐다(오른쪽 사진). 동아일보DB
소 500마리를 몰고 간 1차 ‘소떼 방북’ 당시 정주영 회장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당시 83세였던 정 회장은 4개월 뒤 소 501마리를 몰고 2차 방북을 한 뒤 김정일과 면담했다(왼쪽 사진).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북한 보초병에게 피격 당한 박왕자 씨의 시신이 남측에 인도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지는 모습. ‘박왕자 씨 피격 사건’ 이후 금강산 관광은 여지껏 중단된 상태다(가운데 사진). 2013년 4월 정부의 개성공단 체류인원 전원 철수 결정에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공단에 남아 있는 물품을 옮기는 모습. 개성공단은 그해 9월에야 다시 가동됐다(오른쪽 사진). 동아일보DB
80년대 중반 시작… 현대 대우 코오롱 주도

남북 경협의 ‘태동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가 크지 않았던 1984년 11월 15일, 제1차 남북 경제회담이 열린다. 그 두 달 전 남한에 대홍수가 났을 때 북한 적십자사가 수재 구호물자를 주겠다고 제의하면서 남한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이 재해를 입은 틈을 타 체제를 홍보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이전까지 대결 일변도였던 남북 관계가 바뀌는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본격적인 시작은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선언’을 통해 남북 간 교역 문호 개방을 천명하면서부터다. ‘북방정책’ 추진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이 선언을 계기로 남북 경협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초기 남북 경협을 주도한 기업은 현대 대우 코오롱 등이었다. 7·7선언 이듬해인 1989년 1월,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경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금강산 관광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물론 실현되기까지는 9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금강산 관광이 실현되기 전까지 남북 경협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대우와 코오롱이다. 당시 코오롱상사는 1989년 홍콩 현지법인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16만 달러 상당의 도자기와 인삼주 등을 구매해 오면서 북한 대성은행에 처음으로 신용장을 개설했다. 이는 남한 회사가 북한 은행에 직접 신용장을 개설한 첫 사례다. 또 2년 뒤에는 약 500만 달러의 양말 제조기를 북한에 수출했는데, 당시 북한이 ‘대한민국’으로 원산지 표기를 한 제품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때 코오롱은 기계관리 전문 기술자 2명을 현지에 파견해 북한에 양말 제조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고, 이 역시 남한 기술자가 북한에 파견된 첫 사례로 기록된다.

1990년대 초반에는 대우가 남포공단을 중심으로 경협을 이끌었다. 1992년 1월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북한을 방문해 평안남도에 있는 남포공단 건설에 합의하고 돌아왔다. 9개월 뒤에는 남포공단 조사단이 방북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 경협은 확대 일변도였다.

간첩 북핵 피격 도발… 남북 경협 ‘잔혹사’의 시작


남포공단 조사단이 방북한 1992년 10월 6일 바로 그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거물급 간첩들의 지휘를 받아 1995년 적화통일을 목표로 암약해 온 ‘남한 조선노동당’ 가담자 95명을 적발하고 이 중 6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정치권은 공안정국으로 들어갔다. 약 일주일이 지난 뒤 정부는 대북 경협 사업을 당분간 중단한다고 발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인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가 이어진다. 남북 경협이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1994년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되면서 위기는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약 2주일 앞두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 관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미국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 계획까지 세우던 상황. 다행히 위기는 그해 10월 북-미 핵협상이 타결되며 넘어간다.

북핵 위기가 사그라든 후 경협은 다시 추진된다. 대우가 추진하던 500만 달러 규모의 남포공단 사업은 1995년 5월 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고, 이듬해에는 대우와 북한 조선삼천리총회사가 반씩 투자한 ‘민족산업총회사’도 설립된다.

금강산 관광을 향한 현대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1998년 2월 정몽헌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과 접촉했고, 4개월 뒤 그 유명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이뤄진다. 현재는 북한에 속한 강원 통천 출신의 정 명예회장은 6월 1차 방북 때 소 500마리, 10월 2차 방북 때 소 501마리를 합쳐 총 1001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는 장관을 연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정 명예회장은 17세 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친이 소 1마리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왔는데, 그때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1000마리에 1마리를 더 보탠 것이다. 1마리는 원금, 1000마리는 이자인 셈이다.

정 명예회장의 2차 방북이 이뤄진 다음 달 금강산 관광이 개시된다. 육로가 뚫리지 않았던 터라 현대상선의 관광선인 ‘금강호’가 관광객을 운송했다. 그리고 이날로부터 10년이 채 얼마 남지 않은 때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 발생한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사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2008년은 ‘민족 화합’이라는 명분 외에도 내부적으로는 금강산 관광 사업이 흑자로 돌아서는 시기로 보던 해”라며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때에 갑자기 사업이 사라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첫 남북 정상회담으로 6·15공동선언이 이뤄지고, 개성공단 설립도 추진된다. 2003년 6월 착공된 개성공단은 1년 후 시범단지에 15개 입주사가 입주계약을 맺은 후 점차 입주 업체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남북 정치 상황에 따라 개성공단은 늘 조마조마한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북한의 급작스러운 요구로 개성공단이 남북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08년 5월에 북한이 개성공단과 관련된 기존 법규와 계약의 무효를 선언하며 토지임대료와 임금 인상 등 조치를 취하라고 통보하면서 “이에 불응하는 남측 기업은 공단을 떠나도 좋다”고 선언해 공단이 폐쇄되는 것 아닌지 불안감이 높아지기도 했고, 2010년 4월 천안함 사건과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부가 개성공단 방북을 일시 금지하기도 했다.

급기야 2013년 4월에는 개성공단 폐쇄 결정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다. 북한이 당시 남북정세를 거론하며 “우리의 존엄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려 든다면 공업지구를 가차 없이 차단, 폐쇄해 버리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연이은 대화 노력도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공단에 체류하던 남한 인력들이 모두 철수하고 공단은 잠정 폐쇄됐다. 경협 보험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할 정도로 영영 문을 닫을 줄 알았던 개성공단은 8월 남북이 재가동에 합의하면서 9월 가동 중단 약 160일 만에 극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지난달도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확성기 포격 도발이 이어지자 개성공단 출입 제한 조치가 내려지는 등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이렇게 아슬아슬했던 남북 경협, 과연 효과는 있는 것일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상황과 별개로 성장하는 경협

겉으로 드러난 정치적 군사적 상황만 보면 경협이 지난 30년간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과연 얻는 게 뭐가 있을까 싶을 정도. 하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이런 역사적 상황과는 달리 남북 경협은 꾸준히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20년 전인 1995년 남북 교역 규모는 2억8700만 달러였지만 지난해에는 23억4300만 달러(약 2조7842억 원)로 8배 이상으로 늘었다. 때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했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규모는 커진 것이다. 개성공단만 봐도 2008년 18개였던 입주 기업이 지난해 말 125개가 됐고, 2012년부터는 북측 근로자가 5만3000여 명이 됐다. 지난해 연간 생산액은 4억6997만 달러(약 5585억 원), 누적 생산액은 26억6974만 달러에 이른다. 정부가 대북 제재 수단으로 ‘5·24조치’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경협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후로 남북 교역의 99.8%는 개성공단이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역시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다. 개성공단의 최저임금은 월 70.35달러(약 8만4000원)로, 이마저도 6월에 5%를 인상한 것이다. 여기에 연장·휴일수당, 사회보장비 등을 합쳐 입주 기업들은 북측 근로자 1인당 인건비를 월 150달러 안팎으로 지급하는데, 베트남의 인건비도 370달러 정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업으로서는 충분히 이윤을 낼 수 있는 조건인 셈이다.

게다가 서울과 가까워 물류비도 아낄 수 있고 우리말과 역사를 공유하는 양질의 노동력을 갖추고 있다. 북한으로서도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다.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에서도 남북 경협이 버텨낼 수 있는 이유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오듯 현재 논의되고 있는 금강산 관광 재개가 실현된다면 남북 경협의 역사는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또 5·24조치로 북한에 직접투자가 어려워지자 최근에는 북한과 거래가 활발한 중국 지린(吉林) 성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을 통한 간접투자가 이뤄지기도 하는 등 경협의 또 다른 형태가 언제든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최고의 남북 경협은 통일이 아닐까. 그때야말로 남북 경협의 ‘잔혹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날일 것이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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