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환자복 벗고 바리스타 옷… ‘마음의 병’ 치유 빨라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국립서울병원 한우리카페

서울 광진구 국립서울병원 1층에 위치한 한우리카페는 정신질환을 극복해가는 사람들이 지역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연습을 하는 직업 재활시설이다. 유호석 씨(가운데)는 지난해에 일반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해 올해는 카페 운영을 책임지며 다른 환자들을 교육하는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됐다. 카페 운영을 지원하는 작업치료사 서순애 씨(오른쪽)는 “환자들이 좋아져서 실제로 이 카페에서 일하게 됐을 때가 가장 기쁘다”라고 말했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서울 광진구 국립서울병원 1층에 위치한 한우리카페는 정신질환을 극복해가는 사람들이 지역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연습을 하는 직업 재활시설이다. 유호석 씨(가운데)는 지난해에 일반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해 올해는 카페 운영을 책임지며 다른 환자들을 교육하는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됐다. 카페 운영을 지원하는 작업치료사 서순애 씨(오른쪽)는 “환자들이 좋아져서 실제로 이 카페에서 일하게 됐을 때가 가장 기쁘다”라고 말했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저 손님은 분명히 나를 믿지 않을 거야. 이 커피에 독을 탔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경찰을 불러 나를 감옥에 처넣을지도 몰라.”

아무리 마음을 진정하려 해도 불길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커피를 사기 위해 다가오는 손님들이 마치 나를 잡으러 오는 귀신처럼 느껴졌다. 지난해 서울 광진구 국립서울병원 1층에 위치한 한우리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한 유호석 씨(38)는 한동안 이런 피해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신질환자에서 카페 관리자로


유 씨는 사실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다. 평범한 대기업 대리였던 2006년부터 갑자기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꾸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가족은 “왜 그렇게 혼잣말을 하니?”라고 물었다. 환청에 반응을 하는 것을 가족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저능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의사는 유 씨에게 조현병(정신분열증) 진단을 내렸다. 유 씨는 “대학도 나왔고, 군대도 다녀왔고, 번듯한 직장도 있는 내가 왜?”라며 받아들이지 못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폭력적인 성향까지 드러냈다. 결국 정신병원 폐쇄 병동에 입원해야 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수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유 씨에게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건 국립서울병원 낮 병동에 다니면서다. 잠은 집에서 자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낮 병동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다양한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증세가 완화된 유 씨는 사회 복귀를 도와주는 한우리카페에서 일하면서 자신감이 배가됐다. 1년이 지난 요즘 그는 다른 환자들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됐다. 도움이 필요하던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신한 것이다. 유 씨는 “발병 후 운전을 하지 못했다. 항상 팔이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운전도 하고, 딸과 춤도 춘다. 잃었던 팔을 되찾은 것 같다”라고 웃었다.

세상을 버텨 낼 힘을 주는 한우리카페

유 씨가 새 삶을 얻은 한우리카페는 지금까지 약 50명의 정신질환자에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만들어 줬다. 국립서울병원은 경증 정신질환자들이 사회로 돌아가 직장을 얻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자는 취지로 1997년 이 카페를 열었다. 2013년에는 에스프레소 추출 기계 등을 갖추고 현대적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의 면모를 갖췄다.

카페는 정신질환 외래 환자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1층 로비에 있다. 카페에서 일하는 환자들이 최대한 일반인과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또 증상이 심한 환자들은 이 카페에서 일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치료 의지를 다질 수 있다. 카페 운영을 지원하는 작업치료사 서순애 씨는 “중증 정신질환자 부모들이 카페를 지나면서 ‘우리 자식도 이 사람들처럼 좋아질 수 있는 거죠?’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랬던 환자들이 좋아져서 실제로 이 카페에서 일하게 됐을 때가 가장 기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하면서 치료를 겸하는 환자들은 회복 속도가 빠른 편이다. 심민영 국립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심리지원단장은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정신질환자들은 일반인과 섞이는 것만으로도 큰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치료 효과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일할 기회를 얻기도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 카페에서 일하는 환자는 총 4명. 2개월마다 지원자를 받아 선발한다. 최근에는 4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일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하루에 2시간 30분씩 주 5일을 일하면 최소 15만 원에서 최대 30만 원까지의 임금도 지급된다. 매출에서 운영비를 제외한 금액으로 임금을 상정하기 때문에, 많이 팔면 팔수록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윤석란 국립서울병원 수간호사는 “경증 환자들의 재활 프로그램으로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한우리카페에서 일한 환자가 그 돈으로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커피 맛은 여느 전문점 못지않아


가벼운 정신질환자들이 함께 모여 일하기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신질환자들은 대게 강박 증상을 갖고 있다. 정해진 매뉴얼에 딱 맞춰서 생각하고,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것. 같은 말을 반복하는 틱 장애도 이런 강박 증상의 일종이다.

신입 직원들은 주문을 받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손님이 “커피 한잔 주세요”라고 할 때 “커피라는 메뉴는 없는데요”라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메뉴판에 ‘아메리카노’는 있지만 ‘커피’라고 쓰인 메뉴가 없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정산했을 때, 잔돈이 맞지 않을 경우 밤늦게까지 퇴근을 하지 않고, 계산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카페에서 일을 배웠던 이수목 씨(27)는 “돈을 받을 때마다 계산이 틀리지 않을까 스트레스가 심했다. 처음엔 1만 원 가까이 차가 나기도 했다”라며 “하지만 돈이 딱딱 들어맞을 때 ‘남들보다 내가 느릴 뿐이지 못할 일은 없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라고 말했다.

정신질환자들이 일하는 카페이기에 여느 카페보다 우수한 점도 있다. 강박 증상이 있는 이들은 청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많다. 도구를 사용하면 반드시 그 자리에 둬야 하는 경향도 있다. 이 때문에 이 카페는 먼지 하나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리 정돈이 잘 돼 있다.

정신질환자들이 만드는 커피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터. 하지만 기자가 직접 맛본 커피는 콩다방, 별다방 등 유명 커피 브랜드 못지않은 맛을 지녔다. 아메리카노 1000원, 카페라테 2000원, 팥빙수 3000원 등 저렴한 가격도 인기 비결이다. 이 카페에서 계산 기계 조작법을 배워 퇴원 후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이유비 씨(34)는 “20대를 거의 방에서만 보낸 내가, 자격지심이 가득했던 내가, 지금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는 일을 한다는 건 기적이다”라며 “한우리카페가 다시 살아갈 힘을 줬다”라고 말했다.

정신질환 치료, 격리에서 재활로 패러다임 변화


정신질환자에 대한 치료가 직업 재활 중심의 개방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50년대 이전까지 국내엔 정신질환 치료제조차 없었다. 그 때문에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 정신질환자를 ‘격리’해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이유다. 그 바람에 이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구타하거나, 굿을 하는 등 비과학적인 처방이 주를 이뤘다.

국내에 약이 보급되기 시작한 건 1950년대에 이르러서다. 병자들을 분리된 공간에 몰아넣고 약을 먹이는 식의 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병자들은 주로 폐쇄적인 공간에 격리 수용됐다. 1962년이 돼서야 미국의 원조로 국내 최초의 국립 정신병원이 설립됐다.

정신질환자를 병원에 가둘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돌봐야 한다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1995년 정신보건법이 만들어진 뒤다. 정신질환자에게도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운동이 시작됐다. 병원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치료가 진행돼야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우리카페 등 다양한 직업 자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국립서울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평균 입원 일수는 77일로 국내 평균(176일)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정신병원 병상 수가 늘어나는 국가는 한국을 비롯해 몇 나라밖에 없다”라며 “이제는 정신질환자 치료도 병원에 가두는 방식이 아니라 재활, 직업 교육 등 열린 공간에서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혹시 나도… ‘마음의 병’ 알면 막을 수 있어요▼

부모 모두 조울증 있으면 자녀 발병률 30∼50%


“정신과 약은 중독된다. 약이 아닌 의지로 극복해야 한다.”

미국 유학 중에 항우울제를 복용하며 우울증을 견뎌 왔던 20대 여성 최모 씨는 지인들에게서 이런 지적을 자주 들었다. 증상이 완화됐다면 약을 끊어 보라는 것. 최 씨는 지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복용 3개월 만에 약을 끊었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약 복용을 임의로 중단한 지 2주 만에 불면증이 찾아왔다.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수면제를 먹으면서
버텼지만 이내 약도 잘 듣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가량 잠을 이루지 못한 최 씨는 충동적으로 수면제를 40알가량 먹고 병원에 실려
가야 했다. 최 씨는 “항우울제를 6개월 이상 꾸준히 복용하라는 의사의 처방을 무시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했다.

정신질환 치료는 유독 쉬쉬하며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인식은 제대로 된 치료를 막는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정신질환자는 의료진을 믿고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재발 가능성을 높이고 완치에서 멀어지는 길이다”라고 입을 모은다.
완치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치료의 기본 원칙 두 가지를 알아봤다.

①약 복용 임의 중단 말아야


전문가들은 최 씨처럼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고 약 복용을 임의로 중단하는 것이 가장 위협적인 재발 요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신질환 약을 끊는 것은 감기약을 그만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한 행위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우울증은 항우울제를 최소
4∼5개월, 길게는 1∼2년 동안 꾸준히 복용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1∼2개월 약을 복용한 후 우울, 불안 증세가 호전됐다고
해서 약 복용을 중단하면 재발 위험성이 2, 3배 높아진다. 실제로 독일 저먼윙스 항공기를 고의로 추락시킨 조종사도 임의로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정신질환 치료를 받은 사람의 54.9%가 의사의 지시 없이 임의로 약 복용을 끝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 지시로 치료를 종결하는 경우는 28.6%에 불과했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신건강은 고혈압,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이다. 다수의 질환은 꾸준히 약을 복용하면 충분히 정상 생활이 가능하지만 임의로 약을 끊으면 최악의 경우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항우울제, 기분조절제, 항정신성약물 등은 중독성이 없으니 장기 복용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반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받은
약을 거부하고,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수면제에 의지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수면제, 안정제 등은 일부 내성이 강하고
중독성도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②가족력 있다면 조기 진단에 힘써야

가족 중에 우울증,
정신분열(조현병), 조울증 등 정신질환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신질환은 가족력과 연관이 깊은 병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2011년 실시한 전국정신질환실태조사에 따르면 우울증을 평생 1번 이상 겪는 사람은 6.7%에 이른다.
하지만 부모 또는 형제 중에 우울증이 있는 사람의 발병률은 약 2.8배 높았다.

100명 중 1명 정도가 겪는
조현병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부모 중 한 명이 조현병일 경우 자식의 유병률은 12%, 부모가 모두 조현병일 경우 자식의 유병
가능성은 40%에 이른다. 기분 변화가 심한 조울증도 마찬가지다. 부모 중 한 명이 조울증을 겪으면 자녀의 조울증 발생 가능성은
10∼25%. 부모 모두 조울증이 있을 경우 자녀의 발병 위험은 30∼50%까지 상승한다. 부모가 알코올의존증 환자인 사람의
유병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3∼4배 높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심민영 국립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60세 이전에 발병하는 조기 치매는 상대적으로 유전적 영향을 더 받는 질환이다. 조울증,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도 충분히 후천적으로 발병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력이 있을 경우에는 조기 발견에 힘써야 한다. 정신질환자들은 증상이 나타나도 “나는 아닐거야”라고 묵혔다가 심각해진 후에야 병원에 가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국립서울병원#한우리카페#정신질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