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 산속으로 들어간 까닭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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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행시생이 찾던 산속 고시촌… 요즘은 9급-경찰 준비생이 주류
부모 눈칫밥-친구들의 유혹 피해… 세상과 담 쌓은채 채용시험 공부
“이 시대 청춘들은 취업 난민”

점점 더 부모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밤이면 친구들 연락에 술자리로 불려가는 일도 많았다.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는 것도 지겨웠다. 익숙한 공부 환경에 정신 상태도 나태해져만 갔다. 변화가 필요했다. 세상과 담 쌓고 채용시험을 준비하고 싶었다.

취업을 준비하며 시내 독서실을 전전하던 홍정선 씨(27·충북 청주)는 고민 끝에 재작년 3월 집을 나와 충북 보은군의 한 산속 고시촌에 들어갔다. 인근 마을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도로 위에 새 떼가 온종일 앉아 있어도 될 만큼 외진 시골 마을이다. ‘취업 난민’이라 자조하는 청춘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 취직하러 산으로 간 청년들

1991년에 지어진 이 고시촌은 한때 사찰 공부방이 그랬던 것처럼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준비생의 메카였다.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요즘 이곳은 9급 공무원시험, 경찰채용시험, 자격증 취득시험 준비생이 찾는 최후 격전지로 바뀌었다. ‘고시도 아닌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취업 절벽’에 내몰린 청춘의 심정은 누구보다 절박하다. 그렇게 매년 가을 겨울이면 40여 명의 취업고시생들이 부푼 꿈을 안고 이곳을 찾고, 또 시험이 끝나면 하산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신입 순경 공채시험을 보름 정도 앞둔 홍 씨는 요즘 오전 6시 반에 일어나 밤 12시가 훌쩍 넘어 잠든다. 오전 7시 졸음을 쫓아가며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아침 식사 시간. 잠깐의 ‘커피 타임’이 끝나면 그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공부-식사’라는 단순한 강행군이 이어진다. 체력 단련을 위해 저녁 식사 전 헬스장 이용 30분, 그리고 산책 15분이 자신에게 배정한 자유시간이다.

그는 “공부에 방해될까 봐 휴대전화는 아예 숙소에 두고 독서실에 간다”며 “빨래는 사흘에 한 번,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이곳 동료와 ‘스터디’ 하는 시간 외엔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다”라고 말했다. 숙식비를 포함해 고시촌 한 달 평균 생활비 40만 원 안팎. 가끔 부족한 생활비를 아껴 읍내에서 치킨과 맥주를 사오는 날이면 이 고시촌의 잔칫날이 된다.

각오가 흐트러졌던 때도 있었다. 혈기왕성한 20, 30대 남녀가 경치 좋은 곳에서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다 보니 종종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도 한다는 것. 홍 씨는 “속세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는데, 처음 1년 동안은 야유회 온 기분이 들어 동료와 어울려 한참을 놀았다”며 “합격한 동료들이 떠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며 자책했다.

○ 이 시대 청춘은 모두 ‘취업 난민’


고시촌 김창영 원장(72)은 “예전에는 이곳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하위직 공무원시험 준비생이 이젠 (고시원에) 주류가 됐을 만큼 취업난이 심각한 듯하다. 인근 사찰도 마찬가지다”라고 전했다.

채용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뒤 현재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김모 씨(32·서울)는 “2개월 전부터 이곳에 들어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어머니로부터 격려 문자가 온다”며 “못난 아들 걱정에 속앓이하고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취업난에 산까지 찾아온 자신의 처지를 ‘취업 난민’이라고 표현했다. 취업에 도움 되는 환경을 찾아 유랑하는 모습이 꼭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도는 난민의 모습과 닮았다는 뜻이다. 그는 “산과 절로 찾아드는 고시생뿐만 아니라, 취업 명당을 찾아 도심 고시촌, 대학가 쪽방촌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도는 이 시대 청춘들은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라며 “더 이상 취업을 꿈만 같은 일로 생각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은=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청년#산속#취업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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