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우익, 92년전 구호 ‘불령선인’ 아직도 외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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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규명… ‘9월…’ 펴낸 日가토 나오키씨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파헤친 책을 펴낸 가토 나오키 씨가 1일 추모식에서 강연하는 모습.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파헤친 책을 펴낸 가토 나오키 씨가 1일 추모식에서 강연하는 모습.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이곳은 지금 카페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가메이도(龜戶) 경찰서가 있던 자리입니다. 여기서 조선인 50∼60명이 군에 학살당했습니다.”

1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미나토(港) 구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중앙본부. 가토 나오키(加藤直樹) 씨가 스크린 속 사진을 설명하자 청중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낮은 한숨 소리도 들렸다.

가토 씨는 지난해 간토(關東)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파헤친 책 ‘9월, 도쿄의 거리에서’를 낸 인물. 책은 목격자들의 증언 및 시간대별 상황과 함께 학살이 있었던 장소를 명시해 오래전 일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책은 일본에서만 1만 부 이상 팔렸으며 최근 한국어로도 출간됐다.

가토 씨는 이날 간토대지진 92주년을 맞아 희생자 추모식에서 강연했다. 그는 조선인 학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 도지사의 발언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의 대표적 우익 인사인 이시하라 전 도지사는 재직 시절이던 2000년 자위대 앞에서 “불법 이민이 많은 3국인(한국 대만 중국인)이 흉악 범죄를 되풀이하고 있다. 큰 재해가 일어날 때 소요가 예상되는데 경찰력으로는 한계가 있어 여러분의 출동을 부탁드린다”라고 해 논란을 불렀다.

가토 씨는 당시 발언을 들으며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이렇게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자료를 조사한 결과 재해가 발생할 때 소수 집단이 폭동을 일으키는 예는 찾기 힘들었다”며 “유언비어 확산을 막아야 할 정부가 오히려 루머를 확산시켰다”고 지적했다.

학살의 진상을 다룬 자료를 모아 가다 2013년부터 시작된 혐한 시위를 보고서는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침 그는 한류(韓流)의 발원지이자 혐한 시위가 시작된 도쿄 오쿠보(大久保) 출신이었다.

“오쿠보에서 헤이트 스피치(특정 인종이나 국적의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발언)가 일어나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반대 시위를 준비했다. 특히 92년 전 학살 때 사용됐던 ‘불령선인(不逞鮮人·불순한 사상을 가진 조선인)’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이러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책에는 한국인이 보기에 몸서리쳐지는 대목이 많다. 조선인을 죽이는 것을 애국이라고 믿고 사냥하듯 죽이던 일본군, 일본인 아내 앞에서 조선인 남편을 죽이던 자경단, 집에 있던 일본도를 들고 나와 조선인의 몸을 베며 의기양양해하는 모습…. 당시 폭동을 일으켰다거나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루머에 희생된 조선인은 6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가토 씨는 평범한 일본인들이 학살에 가담했던 배경으로 ‘두려움’을 꼽았다. 3·1운동 이후 조선인의 반발을 두려워하던 일본인들의 공포 심리가 유언비어를 만나면서 ‘당하기 전에 죽이자’는 식의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강의를 끝낸 가토 씨는 기자와 만나 “최근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수면 아래에는 역사수정주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며 “헤이트 스피치를 금지하는 법이 국회에서 논의 중인데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을 계기로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했다. 하루 종일 다양한 행사가 열렸지만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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