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의지 앞에 ‘벽’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다른 건 됐고, 결혼을 해. 결혼을.”

친구들과 찾아간 인사동의 한 사주집에서 아저씨는 과년한 여자들이 던지는 질문(“일은요?” “시험은요?” “직장은요?”)을 ‘남자’와 ‘결혼’으로 일축했다.

“지금 시험운이 2고, 결혼운이 8이니 될 법한 걸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아저씨가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우리에게 제안한 결론이었고, 우리는 마트에서 남자를 살 수도 없는 노릇인데 결혼은 무슨 결혼이냐고 구시렁거리며 그곳을 나왔다. 나오고 나서 얼마간은 “시험이건 직장이건 뭐든 해봤자 안 될 거”라는 단호하기 이를 데 없던 아저씨의 말이 자꾸 떠올라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더랬다. 그런데 잠시 후, 우리는 문득 오기 같은 게 생겼다. (인생이란 게 오기로 살아지는 거냐만서도) 오기로라도 저 아저씨가 하지 말라는 걸 하고 싶다는, 아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30대 여자가 할 것은 결혼뿐이라는 그 말에 어깃장을 놓고 싶었던 마음도 있고.

나이를 먹다 보니 무언가 하고 싶어도 제도상 나이 제한에 걸리고,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나이 제한(‘나, 그걸 하기에 나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에도 걸린다. 사주를 보러간 집의 아저씨가 했던 말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상정한 어떤 한계들을 명리학을 근거 삼아 확인해 준 것뿐일지 모른다. 고개를 끄덕이고 아, 지금은 이걸 할 때가 아니구나. 내 나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게 있구나. 되어야 하는 모습이 있구나. 이렇게 우리는 사회적으로 공모된 소위 상식이라는 것을 학습하고 벽과 제한을 스스로 내재화한다.

‘벽’ 이야기를 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007년, 카네기멜런대의 ‘마지막 강의’로 일순 유명해진 교수가 있다. 이름은 랜디 포시.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바싹 마른 몸으로 학생들 앞에서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그 인상적인 강의에서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들이 무엇이었는지, 그 꿈을 이룰 때 어떤 장애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그 장애물들을 어떻게 넘었는지. 꿈을 좇다 보면 누구라도 어떤 시점에서 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 벽은 충분히 자격이 있지 않은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느냐를 확인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게 강의의 요지 중 하나였다. 그 벽을 넘을 것이냐, 벽을 뒤로하고 돌아설 것이냐는 우리의 능력에 달렸다기보다는 우리의 간절함과 절실함에 달렸다는 말이다. 절실함 운운해서 뭔가 대단한 것들이 이어져야 할 것 같지만 그냥 사소하게는, ‘시험운이 고작 2할’이라고 해서 볼 것도 없다고 말하는 그 시험을 오기로라도 합격하는 건… 절실함과는 조금은 다른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벽을 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엑스플렉스에서는 ‘자기 책을 자기가 만드는 프로그램’인 텐북스라는 게 있는데, 최근 이 1기 수료생 중에 기자 출신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엔 하지 말라는 걸 굳이 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 직장을 2년 만에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시작한 젊은 퇴사자. 퇴사 후 여행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기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기에는 왜 스스로 인생을 힘들게 만드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 스스로도 대답해내지 못하는 질문들 끝에 마침내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은 그가 결국 혼자 힘으로 벽을 넘는 모습으로 보였다. 남들 눈에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택이었을 테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 벽을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남들이 안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 데에도 남들과 똑같은 바로 그 이유가 필요하지는 않은 법일 테다. 인생의 진짜 실패와 재난은, 도무지 넘지 못할 벽을 앞에 마주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당연히’ 넘지 못할 것이라며 100m 앞에서부터 돌아서는 일이다. 진짜 재난은, 벽과 충돌하는 일이 아니라 충돌조차 하지 않는 일일지 모른다.

내가 살면서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손에 꼽아 본다. 바이올린을 배워 유럽에 가고 싶고, 옹기와 스테인드글라스의 장인이 되어 보고도 싶다. 지금, 인생의 답은 결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 떠올리는 할 일의 목록치고는 꽤 그 ‘답’과는 멀어 보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재난은 결혼을 못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그 일의 목록을 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각자의 삶에서 벽을 벽으로, 기회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다.

벽은 우리가 넘지 못할 때만 벽이다. 넘고 나면, 넘어뜨리고 나면 더이상 벽이 아니다.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