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트와 함께 동서독 화해의 문 연 에곤 바르 前 서독 경협장관 타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統獨의 씨앗뿌린 동방정책 설계자

독일 통일의 밑그림이 됐던 ‘동방 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르 전 서독 경제협력장관이 20일 향년 93세로 타계했다. 독일 주간지 슈테른은 바르 전 장관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바르 전 장관은 1969년 사회민주당(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 시절 ‘접촉을 통한 변화’를 기조로 한 독일 통일 정책을 설계했다. 이는 1990년 베를린 장벽을 허무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접촉을 통한 변화’는 통일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대신 통행 허용이나 가족 방문과 같은 작은 조치들로 변화를 이끄는 정책이다. ‘작은 발걸음 정책’이란 별명이 붙은 배경이다.

그의 동방 정책은 ‘지금의 상황’을 먼저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전후 소련을 상대로 동독과 서독의 경계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하고, 대신 통일 문제는 독일 스스로 해결한다는 자결권을 얻어낸 1971년 모스크바 조약도 그가 주도했다. 1973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도 이끌었다.

그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안정(현 체제)과 변화(통일)’라는 두 요소를 대립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시차를 두고 그 모순을 끌어안음으로써 ‘안정 그리고 변화’로 탈바꿈시켰다.

통일 문제는 정권을 뛰어넘는 사안이라 생각하고 몸소 실천했다. 소속 정당은 사민당이었지만 1982년 정권이 기독민주당(기민당)으로 넘어갔어도 헬무트 콜 총리를 만나 옛 소련에 있던 자신의 비선까지 고스란히 넘겨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한 초당적 결행이었다.

1922년 독일 중부 소도시 트레푸르트에서 태어나 기술자로 일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할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전역했다. 전쟁 후 알게마이네차이퉁 등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1960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던 브란트에 의해 시장 언론공보처장이자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고인은 1957년 ‘동방 정책’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으며 정책의 핵심인 ‘접근을 통한 변화’ 개념은 1963년 ‘투칭 아카데미 연설’에서 처음 소개했다.

1969년 브란트가 총리에 오른 뒤에는 총리실장을 맡았고, 1972∼74년에는 특임장관으로서 동방 정책을 함께 실행하기도 했다. 1974년 브란트가 실각하자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 아래서 2년 동안 경제협력장관을 지냈다.

독일의 정치 평론가들은 “많은 정치 참모 중 누구도 바르처럼 지도자의 참모이면서 친구이면서 동료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1992년 병상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던 브란트에게 아들 라르스가 ‘아버지에게 친구는 누구였냐’고 물었을 때 브란트가 “에곤”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사민당 당수는 20일 “고인은 용기 있는 진정한 사회민주주의이자 통일과 유럽 평화의 설계자”라며 추모했다.

고인이 2013년 발표한 ‘독일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를 지난해 공동 번역한 박경서 전 인권대사는 “고인은 아무런 사심 없이 오로지 민족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동방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했기에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기용돼 그 정책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96년 방한했던 그를 만나 우정을 나눴던 박 전 대사는 고인이 남북통일을 위해 했던 조언도 소개했다.

“첫째, 절대로 통일 문제는 정권 차원에서 다뤄져선 안 된다. 둘째, 아무런 의제가 없더라도 자꾸 만나야 한다. 셋째, 아무리 징징대고 울더라도 밥 먹는 법을 가르쳐야지 밥을 먹여줘선 안 된다.”

허진석 jameshuh@donga.com·권재현 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