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강수진]문화가 없는 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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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문화부장
강수진 문화부장
“…푸틴 대통령과 부인 류드밀라는 어제 저녁 발레공연을 함께 관람한 후 공연장에서 국영 러시아 TV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혼을 발표했습니다.”

몇 년 전 남의 나라 대통령의 이혼 뉴스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건 결혼 30년 차 현직 대통령 부부가 ‘쿨하게’ 카메라 앞에서 황혼이혼을 발표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내 귀를 잡아당긴 건 “발레공연을 관람한 후”라는 말이었다. 그들에겐 문화생활이 일상인 걸까.

‘문화가 있는 삶’은 박근혜 대통령의 꿈이다. 적어도 국정과제만 놓고 보면 그렇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 4대 정책 기조 중 하나로 ‘문화융성’을 내세웠을 만큼 역대 어느 정부보다 문화에 관심이 크다.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최근 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화두로 또다시 문화융성을 강조했다.

그동안 문화융성의 간판 정책은 ‘문화가 있는 날’이었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해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 등의 관람료를 할인 또는 무료로 해준다. 문화 저변을 넓히겠다는 취지다. 대통령도 해외순방 같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가급적 문화가 있는 날엔 문화현장을 찾았다. 국산 애니메이션 ‘넛잡’을 시작으로 원 소스 멀티유스 사례인 창작뮤지컬 ‘김종욱 찾기’, 한국 근대사를 긍정적으로 그려내며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 ‘국제시장’ 등 의미를 부여해 작품을 선택했다.

하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하루 날을 정해놓고(심지어 평일인 수요일) 캠페인처럼 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다. 문화계 일각에서 “그럼 한 달에 하루 빼곤 문화가 없는 날이란 말이냐”며 시큰둥해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의욕에 비해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시행 2년 차를 맞아 본보가 올 3월 문화계 전문가 4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평가점수는 5.8점(10점 만점)에 그쳤다.

문화 저변을 확대하는 정책이 단시일에 가시적 성과를 거두긴 어렵다. 무엇보다 문화가 있는 삶을 위해선 사회적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는 1년에 평균 2163시간 일한다. OECD 평균(1725시간)보다 438시간 많고 가장 적은 독일(1388시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반면 수면시간은 최하위다. 통계청의 ‘2014년 생활시간조사’를 보면 30대는 90.3%, 40대는 89.2%가 ‘피곤했다’. 요즘 유행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광고 카피가 공감을 얻는 것도 그만큼 우리 사회가 지쳐 있기 때문 아닐까. 결국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지 않는 한 문화가 있는 삶도 먼 얘기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국정 2기 문화융성 정책’을 보면 문화 저변 확대보다는 경제적 가치 창출로 방향을 튼 것 같다. 케이팝 공연장 건립 등 문화창조융합벨트를 조성해 창조경제의 마중물로 삼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코리아 프리미엄’ 창출도, 문화영토 확장도 필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문화융성은 수치가 아닌 일상에서 문화를 즐기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집권 후반기를 시작하는 첫날인 26일은 마침 ‘문화가 있는 날’이다. 대통령도 관저에서 보고서를 읽는 대신 문화현장을 찾았으면 한다. 아니, 꼭 ‘문화가 있는 날’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수시로 문화를 즐겼으면 좋겠다. ‘문화가 없는 날’에도 문화는 있으니까.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
#문화#문화가 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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