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전쟁 휩쓸린 어느 日本人의 인생유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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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양심의 탄생/오구마 에이지 지음/김범수 옮김/358쪽·1만6000원·동아시아
관동군 → 시베리아 포로 → 종전후 평화 활동

1943년 지인의 군대 입영자 송별회에 참석한 오구마 겐지(앞줄 오른쪽 두번째). 그 역시 1944년 11월 징집돼 관동군 이등병으로 복무하다 패전 뒤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3년 동안 억류됐다. 그는 귀향 뒤 “바보 같은 전쟁을 시작해서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 제공
1943년 지인의 군대 입영자 송별회에 참석한 오구마 겐지(앞줄 오른쪽 두번째). 그 역시 1944년 11월 징집돼 관동군 이등병으로 복무하다 패전 뒤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3년 동안 억류됐다. 그는 귀향 뒤 “바보 같은 전쟁을 시작해서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 제공
간도 참변이나 난징 대학살 등에서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한 일본 ‘황군’은 ‘악마’였다. 그러나 그게 일본군 전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황군의 상당수는 보통 사람이었다.

이 책은 그런 일본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준다. 1925년 태어난 오구마 겐지가 1944년 11월 징집돼 관동군에 배치되고, 패전 뒤 구 소련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노역하다가 돌아온 이야기다. 오구마의 구술을 게이오기주쿠대 종합정책학부 교수인 아들이 책으로 펴냈다.

오구마는 만주 헤이룽장 성 동남부 닝안 지역의 관동군 항공통신연대에 배치됐지만 전투를 치른 적이 없고, 총 한 방 쏘지 않았다. 패전 소식을 들은 뒤에는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기뻐했지만 그를 포함한 일본군 등 약 64만 명(강제 동원 조선인 약 1만 명 포함)은 소련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등에 분산 수용된다.

1991년 43년 만에 시베리아 치타 수용소 터를 다시 찾은 오구마 겐지. 동아시아 제공
1991년 43년 만에 시베리아 치타 수용소 터를 다시 찾은 오구마 겐지. 동아시아 제공
오구마는 시베리아 연방관구 치타 주의 치타 제24지구 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로 가는 열차 안에서 포로 한 명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수년 뒤 귀환 때까지 그와 함께 수용된 포로 약 500명 중 45명 이상이 죽었다. 추위와 영양실조 탓이었다. 시베리아 포로의 사망률은 약 10%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시베리아 포로가 펴낸 귀환기는 주로 장교나 지식인 출신이 쓴 탓에 젊은 날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초조감 등이 담겨 있지만 오구마는 “그냥 살아남는 데 필사적이었다”고 했다.

건장하지 않았던 몸으로 운 좋게 노역을 견뎌 낸 오구마는 1948년 8월 귀환선을 탄다. 귀향을 학수고대했던 그지만 배에 내걸린 일장기에 대한 감개는 전혀 없었다. 그는 “1945년부터 일장기를 보자기로 썼다”고 했다.

그는 “나는 전쟁을 지지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휩쓸려 간 것이다”고 입대 전의 자신을 회상했다. 군 복무는 “포로가 되기 위해 (만주에) 보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라고 했고 패전 뒤에는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전쟁 책임에 대해 쇼와 천황의 사과를 받고 싶었다”고 했다.

책은 입대 전후 오구마의 개인사를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변동과 함께 서술한다. 전쟁 중 물자가 부족해져 궁핍해지고, 전후에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며 호구책을 찾는 일본 서민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인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의 부모나 조부모 세대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전쟁과 대규모 학살은 별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보통 사람들의 손으로 수행되는 것이기에 평범한 병사라고 무조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오구마 역시 중국군이나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곳에 투입됐다면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였을 것이다.

오구마는 1988년부터 평화를 지향하는 ‘부전(不戰) 병사의 모임’에 참여하며, 과거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시베리아 포로로 수용됐지만 일본 정부의 위로금 지급 대상에서는 배제된 조선인 오웅근 씨를 기억해 내고, 1990년 정부에서 받은 위로금 10만 엔 중 절반을 오 씨에게 보냈다. 1996년에는 오 씨와 공동으로 “일본 정부가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포로에게도 배상을 해야 한다”는 소송을 냈으나 끝내 패소했다.

저자는 “인간은 평범하게 살지만 몇 차례인가 위기를 경험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며 “아버지의 궤적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평균적인 인생행로”라고 말한다. 돌려 말했지만 평화는 힘없어 보이는 평범한 양심에서 온다는 얘기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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