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춧국으로 종기 다스리려 했건만… 무위로 끝난 ‘食治’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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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미식가 열전]조선 초기 어의 전순의

조선시대 왕의 질병 치료 처방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배춧국. 사진 출처 농촌진흥청 요리백과
조선시대 왕의 질병 치료 처방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배춧국. 사진 출처 농촌진흥청 요리백과
요새 의료계가 수난이다. 조선시대 때 의사들도 전염병을 가장 두려워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그 병에 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술이 최고여야만 오를 수 있었던 어의(御醫)들이 더 무서워했던 일은 왕의 승하였다.

왕이 죽으면 담당 어의는 반드시 추궁을 당했고 사약까지 받기도 했다. 전순의(全循義)는 조선의 다섯 번째 왕 문종(재위 1450∼1452년)이 죽었을 때 어의 중 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도 탄핵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았고, 세조는 즉위하면서 그에게 1등공신의 상을 내렸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었을까?

전순의는 세종 때의 명의 노중례(盧重禮·?∼1452)의 의술을 잇기 위해 왕실에서 뽑은 젊은이 중 한 사람이었다. 세종은 일본 승려 숭태(崇泰)를 시켜 그들에게 의술을 가르치라고 했다. 전순의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중국의 여러 의서를 참고해 조선의 사정에 알맞도록 보완한 ‘의방유취(醫方類聚)’라는 의학서 편찬에도 그가 참여했으니 말이다. 전순의는 한발 더 나아가 동료였던 김의손과 함께 침놓는 좋은 시기를 적은 ‘침구택일편집(鍼灸擇日編集)’이란 책도 편찬했다. 당연히 세종에 이어 문종의 신임도 두텁게 받았다.

알다시피 문종은 세자 때부터 아버지 세종을 도와 너무나 많은 일을 했던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르면서 종기를 앓게 됐다. 어의들은 중국의 의서를 뒤져서 치료법을 발견하려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하지만 알맞은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 문종의 종기는 점점 심해졌다. 외과적 수술로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종기를 당시의 어의들은 알지 못했다. 전순의 역시 당황했을 것이 분명하다. 병환 중인 문종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려 궁궐 밖으로 나가려 하자 전순의는 괜찮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심지어 종기에 꿩고기가 좋지 않다는 당시의 상식을 무시하고 꿩고기 요리를 문종에게 올리도록 했다. 세조 때 편찬한 전순의의 책 ‘식료찬요(食療纂要)’에는 배추로 즙을 1되 만들어 하루에 2번씩 복용하면 종기가 낫는다는 치료법이 적혀 있다. 그러나 문종은 결국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이 치료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사실 당시의 의료관은 음식으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식치(食治)’였다. 전순의가 편찬한 ‘식료찬요’는 중국 의서들을 참고하여 45가지의 질병을 치료하는 식치법을 모아둔 책이다. 이 책의 첫 문장에 식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음식이 으뜸이고, 약재가 그 다음이다. (중략) 병이 생기면 옛 사람은 먼저 음식으로 치료를 하고, 음식으로도 치료가 안 되면 비로소 약으로 치료를 하라는 방도를 세웠다.’

비록 문종의 종기 치료에는 실패했지만 전순의가 적어둔 배춧국 식치법은 지금도 효과가 있을 듯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는 증상을 제거하려면 배추 2근을 삶아 국을 만들어 마신다’고 했다. 배춧국은 또 술을 마시고 난 뒤에 생기는 갈증을 풀어주는 데도 좋다고 한다. 전순의 당시에 서울배추는 동대문 바깥에서 많이 재배됐다. 가을이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배추는 식치의 주재료였다. 당시만 해도 왕의 음식은 의술을 익힌 식의(食醫)가 맡았다. 그런데 세조는 1466년(세조 12년)에 사선시(司膳寺)라는 음식 담당 부서를 설치하면서 식의제도를 폐지했다. 혹시 문종의 죽음에서 배운 교훈 때문에 세조 본인은 전순의의 ‘식치법’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배춧국#조선어의#전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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