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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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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한 해에 다섯 통 정도. 독자의 격려 메일을 받는다. 업무의 결과물을 누군가가 좋게 보고 시간 들여 편지까지 써서 보내줬다는 사실은 일상을 버티는 데 적잖은 힘이 된다. 하지만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칭찬이 과할수록 더 그렇다. 행여 글 쓴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갖게 됐다는 내용일 때는, 민망하고 두렵다.

인쇄되는 글은 일필휘지의 결과가 아니다. 더듬더듬 머리를 쥐어짜며 겨우 얻은 단어를 어찌어찌 늘어놓은 징검다리가 여러 검토 과정을 통해 다듬어져 독자를 만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얕은 깜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허튼 문장이 심심찮게 섞인다. 이름 건 글을 내놓으며 살아가는 건 어깨 위에 날마다 차곡차곡 짐 하나씩 보태 얹으며 걸어가는 것과 같다.

“글에 속았다.”

살아오면서 들은 어떤 말보다 마음 시렸던 말이다. 아픈 말을 들었으니 나는 피해자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내놓은 글과 말에 비해 실체가 보잘것없었다. 10년쯤 지났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손에 잡은 글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는 건 읽는 이 각자의 권리다. 글로 미루어 글 쓴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떨까. 글은 공들여 정화된, 자아의 부분적 이미지다. 글 쓰는 걸 직업으로 삼아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내놓은 글에 ‘나를 대신해 살아가라’ 지시해서는 안 된다. 글은 분신(分身)이 아니다. 사람이 내놓는 허다한 삶의 흔적 중 하나일 따름이다.

글로, 노래로, 영화로 성공한 이들은 때로 자기가 글을 잘 써서, 노래를 잘 해서, 연출이나 연기가 뛰어나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흔한 착각이다. 누군가가 사회적 성공을 거뒀다면 그렇게 만든 건 그의 글이나 노래, 영화가 아니다.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건 같은 시간 속에서 글을 읽어주고 노래를 들어주고 영화를 봐준 타인들이다. 누구든 사람들로 인해, 사람들 덕분에 성공한다.

글을 써서 성공을 얻었던 이의 잘못에 대해 많은 이들이 엄혹한 분노를 토하고 있다. 왜일까. 표절 논문을 인사치레처럼 내놓는 정치인들에게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실망하지 않는다. 포기했기 때문이다. 으레 그런 이들. 실망하거나 마음 아파할 대상이 아니다. 독자가 작가에게 분노하는 건 유권자가 정치인의 부도덕에 분개하는 것과 다르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솟는 거다.

‘내가 저런 이의 글을 읽고 밤새 가슴 설레며 눈물 흘렸다니.’

그런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고 한심해서 용서가 안 되는 거다. 글을 통해 독자에게 눈물을 빚지는 건 무섭고 무거운 일이다. 그 글이, 또는 글쓴이의 실체가 어떤 가치를 배신했을 때 상처 입는 쪽은, 마음 찢어지는 피해자는, 글쓴이가 아니다. 눈물 흘리며 먹먹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 대가로 글쓴이에게 사회적 성공을 안겨준, 독자들이다.

상처 입은 독자에게 작가가 사과할 방법이 있을까. 진심 담은 말은, 대체로 길지 않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상처#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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