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헬기 처음 투입해 병력 수송… 베트남전 강습전술 향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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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軍史파견대가 기록한 6·25]

미군, 군견병-의무대 운용 등 실험
軍 명령체계-전투교리 체계화
한국인 특수부대 ‘켈로부대’ 활약상
부대장 인터뷰까지 실어 별도 기록
국군 열흘만에 승리한 백마고지전
‘정신력 강조’ 참고자료에 포함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창설돼 1955년 3월까지 활동한 미국 극동군사령부 소속 8개 군사파견대(MHD)는 전쟁 현장의 사관(史官)이었다. 총 38편에 걸친 미 육군 MHD의 ‘6·25전쟁 연구 분석 프로젝트’ 자료는 동계 전투를 비롯해 고지전, 보급과 수송, 병력의 적정 규모, 장병들의 급여와 사기(morale)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2012년부터 3년여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등에서 MHD 사료와 관련 문건을 발굴하고 수집해 정리한 군사편찬연구소의 남보람 소령(40·학군 35기)은 “미국에서 발간된 6·25전쟁 역사서는 대부분 이 자료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면전인 6·25전쟁을 담은 연구 결과인 만큼 60년이 지난 현재의 한국군에도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 군견병·중대 단위 의무대… 현대전 교리의 씨앗

6·25전쟁은 미국의 합동참모본부가 틀을 잡은 뒤 제2차 세계대전에 이어 치른 두 번째 전쟁이다. 명령 체계와 전투 교리가 다듬어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미국은 6·25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군 전술을 체계화했다.

MHD 사료에 드러난 헬기와 군견병, 그리고 중대 단위의 의무부대 운용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6·25전쟁에서 처음 헬기를 활용한 미군의 실험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대형 수송기가 들어갈 수 없는 지형에서도 짧은 시간 안에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헬기가 수직으로 내려와 병력을 내려 주거나 태우면 적의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미군은 이 경험을 토대로 베트남전쟁에서 수송 헬기 강습착륙(적진에 특수부대원 등을 기습적으로 내려 주는 것)을 할 때 사선 방향으로 기동하는 교리를 발전시켰다.

군견은 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군이 전방 부대의 정찰 활동을 돕는 데 운용했다. 하지만 군견의 훈련과 관리를 전담하는 특기를 가진 군견병을 별도로 편성한 건 6·25전쟁이 최초다. MHD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 8군 예하 26군견대가 운용한 군견 27마리가 모두 독일산 셰퍼드였고 1952년 3월부터 각 사단에 배치됐다. 총 400여 회에 걸쳐 적군의 매복을 파악하는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개를 무서워한 중공군을 상대로 한 작전에서 효과가 컸다.

의무부대 운용도 새로운 시도였다. 미군이 본부 등 안전한 후방 지역이 아닌 사단급 부대에서 외과병원을 운용하는 개념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개발했지만 6·25전쟁 때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미군은 특히 부상자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처음으로 중대급 부대에도 의무부대를 편성하고 이동식 외과 병동을 운용하기도 했다.

○ 한국인 특수부대 ‘켈로부대’

MHD는 3편에서 6·25전쟁 당시 활약했던 8240부대(켈로부대) 부대장들의 인터뷰까지 실었다. 6·25전쟁 초기 미군은 적 후방을 교란할 수 있는 유격부대가 없었다. 반면 북한은 빨치산 등의 후방 교란 작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피부색이 달랐던 미군은 북한 지역 출신 한국인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유격부대를 켈로부대로 흡수했다. 미 특수전사령부는 부대의 모체를 켈로부대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켈로부대의 규모는 3만여 명으로 ‘울팩’ ‘동키’ 등 30개 예하 부대로 구성됐다. 주로 서북도서 등 동·서해상의 북한 군사 거점 지역에서 대북 첩보를 모으고 적군의 주요 군 시설을 파괴하거나 포로 및 난민을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다. 6·25전쟁 중 6000여 명이 전사하고 2000여 명이 다치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산된다.

남 소령은 “MHD에서 별도의 편으로 켈로부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부대가 전세를 바꾸는 데 미친 영향이 컸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켈로부대는 전투에서 핵심 요인인 북한군 사단장 납치에 성공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여 북한군이 이들을 막기 위해 전선에 투입돼 있던 2개 사단을 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 중공군이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백마고지 전투


미군이 치른 고지전이 아니어서 MHD의 38편 기록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MHD 참고자료로 백마고지(395m) 자료가 포함돼 있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이 강원 철원군 북쪽의 요충지를 놓고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간 치른 전투다. 무려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중공군이 6·25전쟁을 기록한 ‘항미원조 전쟁 경험 총결’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이기도 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국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전불퇴(死戰不退)’, 즉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정신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미군에게 전쟁에서 정신력이 승패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강조하기 위해 이 전투에 대한 사후검토보고서(AAR)를 만들어 부대에 배포하기도 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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