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티슈 돈봉투’에 속은 보이스피싱 조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3일 21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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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희망자를 ‘인출책’으로 활용해 수억 원을 가로챈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이번달 4일부터 15일까지 보이스피싱을 통해 피해자 11명에게 4억3300만 원을 가로챈 혐의(상습사기)로 최모 씨(26) 등 4명을 구속했다고 2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 등은 먼저 범행에 이용할 계좌를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통상 보이스피싱에는 대포통장이 이용되지만 최 씨 일당은 신용 등급이 낮은 대출 희망자의 계좌를 확보한 뒤 명의자가 직접 돈을 찾도록 했다. 경찰의 대포통장 단속이 강화된 것에 부담을 느낀 데다 대포통장을 이용해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는 것보다 명의자가 직접 은행 창구에서 인출할 수 있는 액수가 더 크기 때문이다.

최 씨 일당의 중국 총책은 자신을 대부업자로 사칭한 뒤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거래 실적을 쌓아 신용등급이 올라가면 대출을 해주겠다. 우리가 돈을 당신 계좌로 송금하면, 이를 인출한 뒤 돌려주면 된다”고 말했다. 급전이 필요했던 대출 희망자 5명은 피의자의 제안을 승낙했다.

계좌 확보가 끝난 피의자들은 본격적인 보이스피싱 작업에 착수했다. 중국 총책은 주로 20, 30대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서울중앙지검 검사로 소개한 뒤 “당신의 계좌가 범죄에 이용됐으니 금융감독원 계좌로 돈을 입금해 공범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말했다. 중국 총책이 피해자에게 알려준 금융감독원 계좌 번호는 미리 확보해 둔 대출 희망자들의 계좌 번호였다. 경찰은 중국 총책이 국내 온라인 사이트를 해킹해 얻은 가입자들의 신상정보 등을 토대로 범행 대상을 선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신의 계좌에 입금된 돈이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보내온 돈이라는 것을 몰랐던 대출 희망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를 인출해 국내에서 활동 중인 보이스피싱 조직원 최 씨 등에게 전달했다. 피의자들의 범행은 11일 한 대출 희망자의 신고로 덜미가 잡혔다. 보이스피싱 조직원 이모 씨(22)는 대출 희망자에게 두 차례나 현금 인출을 요구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이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조직원들이 나흘 뒤 같은 방식의 범행을 계획 중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15일 경찰은 서울 동대문구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원 김모 씨(19)가 대출 희망자 A 씨와 대출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장면을 포착했다. 잠시 뒤 커피 전문점을 나온 A 씨는 인근 은행에 들어가 창구에 앉은 뒤 현금 5200만 원을 찾으려했다. A 씨를 따라 은행에 들어간 경찰은 은행 관계자에게 “A 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에 이용당하고 있다. 현금대신 가짜 돈을 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경찰의 제안을 받아들인 창구 직원은 A 씨에게 건넬 돈 봉투에 현금대신 은행 사은품인 ‘물티슈’를 넣었다. 경찰 관계자는 “창구 직원이 물티슈를 개별 봉투 다섯 개에 나눠 넣은 뒤, 이 봉투들을 또다시 커다란 봉투에 넣어 A 씨가 가짜 돈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없도록 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몰랐던 A 씨는 은행을 빠져나와 김 씨에게 봉투를 전달했고, 주변에 잠복해 있던 경찰은 김 씨와 은행 주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최 씨를 검거했다. 경찰은 구속된 피의자들 외에 중국 내 총책과 국내에서 활동 중인 조직원들에 대한 추가 수사를 벌일 예정이다.

정윤철기자 trig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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