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오의 우리 신화이야기]주술을 부리는 여신, 백주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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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님을 형상화한 무신도(제주도 중요민속문화재 제240호).
천자님을 형상화한 무신도(제주도 중요민속문화재 제240호).
제주도 ‘세화본향당’에서 모시는 신은 백주또라는 여신이다. 본래 서울 남산 서대문 밖 ‘가는대밭’에서 솟아났는데, 웬일인지 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 눈에 거슬리고 어머니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용왕천자국에 사는 일곱 삼촌의 수청이나 들도록 하라.” 부모는 가차 없이 딸을 쫓아내 버렸다.

일곱 삼촌은 백주또에게 일곱 가지 부술(符術·도구를 사용하여 부리는 주술)을 가르쳐 주었다. 청가루, 백가루, 적가루, 흑가루, 황가루, 녹가루가 든 여섯 개의 주머니와 주황당사(朱黃唐絲·누른빛의 명주실) 매듭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청명(淸明) 삼월 초여드렛날, 용왕문을 열어 조카를 내보냈다. “용서하여 주소서.” 백주또는 곧장 부모를 찾아뵙고 사죄를 청했다. “네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매정한 부모.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다시 딸을 내쫓았다. 열다섯 살 백주또, 어쩔 것인가. 눈물로 세수하면서 제주도 한라산에 산다는 외조부 천자님을 찾아 길을 떠났다.

이 거리 저 거리를 썩 넘어 전라도 장성 갈재를 넘어가니, 쿵더쿵 쿵더쿵, 마침 일천 선비가 재인광대를 데리고 놀음놀이 중이었다. “거문고를 빌려 오거라.” 몸종인 느진덕정하님이 일천 선비에게 가서 청하였다. “여인은 꿈에만 보여도 사물(邪物)인데 무슨 말이냐?” 이 말을 전해 들은 백주또, 청가루를 내어 일천 선비를 향하여 ‘푸우’ 불었다. 가슴이 아프다, 설사가 난다, 죽겠다며 일시에 야단이 났다. “청하는 것을 다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상황을 파악한 선비 하나가 급히 와서 사죄하였다. “괘씸하다.” 허나 백주또는 부술을 거두어 일천 선비를 살려냈다.

이후 눈물 세수의 내력을 거문고 장단에 풀어내고 제주도에 도착한 백주또, 제일 먼저 앞선도 당신께 인사를 청하니 길 안내를 주선해 주었다. 샛다리 냇가에 이르러 어떤 아기씨와 마주쳤다. 허 선장의 따님아기였다. “오늘 저녁은 너의 집에서 머물고 가겠다.” “그리하시지요. 무슨 음식을 잡수십니까?” “손으로 벤 음식은 손 냄새 나서 못 먹고, 칼로 벤 음식은 쇠 냄새 나서 못 먹는다.” 허 선장의 따님아기는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여 백주또를 대접하였다. “급한 지경에 당하거든 이 주머니를 내놓고 나를 생각하고 있으면 세 번까지는 살려주마. 허 씨 댁을 상단골로 맺고 가니, 없는 명을 이어주고 없는 복도 이어 주마.”

백주또는 허 선장의 따님아기에게 보답한 뒤 한라산 백록담으로 향했다. “저는 천자님의 거행집사입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말 도둑놈같이 생긴 포수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백주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더러운 놈, 잡혔던 손목 두었다가 무엇하리.” 백주또는 자신의 팔목을 싹둑 잘라 던져두고 천자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출신 음식 재주 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나와 같이 좌정할 만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에게서 날피 냄새가 나느냐?” 백주또는 도중에 겪은, 서러운 사정을 얘기했다. 분기탱천한 천자님, 그 즉시 단골을 소집하여 공포(公布)하였다. “내 자손이 오는데 겁탈하려 하다니 괘씸하다. 땅 가르고 물 갈라라. 물도 같은 물 먹지 마라. 길도 같은 길 걷지 마라. 사돈도 맺지 마라. 세화리 땅 자손은 간마리 땅에 다니지 말고, 간마리 땅 자손은 세화리 땅에 오지 마라.” 그 후로 천자님이 말한 법이 그대로 실행되었다. 천자님의 말 한마디, 그것이 ‘법’이다. 신화는 성문법 이전의 법이었던 셈이다.

최원오 광주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
#백주또#세화본향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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