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26>슬픔의 빛깔―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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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빛깔―보육원 아이 정아에게 ―김민자(1962∼ )

반짝이는 것들에게는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어

길을 걷다 보면 늘
온전한 것보다
부서지고 깨진 것들
훨씬 반짝거려

강물이 그렇듯 반짝이는 것도
부서지고 깨진 돌멩이
강바닥에 모여 있기 때문일 거야

떠나온 곳에서 한 발 더 허공을 더듬어
길을 만든 나뭇가지
한 마디 더 깊어진 상처 자국
햇빛 아래 내어 말리고 있을 때
나는 보았지
슬쩍 눈물 훔치는
나뭇가지 손등에 묻어 나온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슬픔의 빛깔

말없이 나를 보는 너의 눈빛처럼
상처 난 가슴들 많아
이 봄이
이렇듯 반짝거리나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상적인 아동양육시설로 알려진 ‘안양의 집’ 소식지에서 읽었다. 가슴에 묵직하게 와 닿는 이 구절은 성경 중에서도 ‘사랑의 서(書)’라 일컬어진다는 고린도전서의 13장 3절이란다. 제 힘으로 설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시설이나 정부 부처 일선에서 일하는 이들이 너무 적은 일손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지쳐 쓰러질 지경인 현실이 이따금 신문에 실린다. 박봉을 받으며 사생활도 개인의 행복도 거의 포기하고 살아가는 그이들에게 ‘누가 떠밀었느냐. 당신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냐’며, 희생과 봉사의 기쁨만을 큰 보상으로 건네는 사람도 있으리라. 이 사회 일원들 대부분이 제 몫이 있는 줄도 모르는 채 떠넘긴 짐의 무게로 그이들 삶이 짓눌린다. 사랑의 노동자들,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질 때면 위 글귀를 곱씹으며 다시금 힘을 내리라.

화자는 ‘온전한 것’보다 ‘부서지고 깨진 것들’에 눈이 가는 사람이다. 정아는 ‘부서지고 깨진’ 가정의 아이. 한바탕 비 쏟아지고 갠 봄날, 보육원을 찾아간 화자는 그 아이의 영롱한 눈망울에 어린 부서진 마음에 가슴이 베인다. ‘말없이 나를 보는 너의 눈빛’,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슬픔의 빛깔’…. 관계도 생명도, 부서지고 깨지기 쉬운 우리의 삶! 시의 끝 부분을 읽으며 생각해본다. 우리 한국인이 4월의 그 ‘상처 난 가슴들’을 상기하지 않고 봄을 맞을 날이 올까.

황인숙 시인
#슬픔의 빛깔#김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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