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악마는 ‘훈수’에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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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훈수 신경쓰느라 메르스 초동대응 실패한 靑
“공무원연금법 포기하더라도 국회법 개정안 수용 불가”
黨에 ‘윈-루즈’ 강경협상 요구
靑의 탁상공론식 게임 인식… 野 반발-국정 마비 부메랑될 것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대학교수 가운데는 나처럼 탁상공론에 능한 ‘훈수(訓手)꾼’이 많다. 그들은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줄 알고 또 훈수를 잘 둔다. 다만, 사후적(事後的)으로. 그 많은 경제학자 중 2008년 금융위기를 제대로 예측한 학자가 드물었다는 사실에서 사후적 탁상공론의 한계를 본다.

탁상공론형 훈수꾼이 청와대에도 꽤 있는 것 같다. 정책 당사자인 이들은 마치 구경꾼인 양 ‘유체이탈 화법’으로 훈수를 둔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4일 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여러 언론사 기자들에게 전화해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국회법 개정 관련 발언에 대해 훈수를 늘어놓기에 바빴다고 한다.

유 원내대표가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 명단 등 관련 정보를 신속히 공개하고 당정청 협의를 빨리 열자고 했지만 훈수에 정신이 팔린 청와대는 거부했다. 이러한 메르스 초동 대응 실패가 결국 지금의 위기를 불러왔다.

청와대의 전화 훈수가 있던 4일 밤, 박원순 서울시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메르스에 대한 정부의 안이한 대응을 질타하며 적극 대응을 선언했다.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은 12일 ‘메르스 민심’을 얻은 박 시장이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에서 1위로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반면 ‘메르스 확산 대처 미흡’으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부정 평가는 증가했다.

왜 청와대는 훈수에 빠져 메르스 위기를 자초했을까? 게임이론 관점에서 보면 야당과의 게임에서 윈-윈(win-win)을 능가하는 윈-루즈(win-lose)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산이다. 상대를 압도할 전력을 지녔다면 내가 이기고 상대가 지는 윈-루즈가 최상일 수 있다. 하지만 전력이 비슷하고 게임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윈-루즈를 추구하면 상대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와 모두가 지는 루즈-루즈로 귀결된다. 유명한 ‘죄수들의 딜레마’ 게임이 좋은 예다.

이달 초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은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무산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국회법 개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국회법의 ‘국회가 정부 시행령에 대해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는 개정 조항에서 ‘악마는 디테일(사소한 문구)에 있다’는 서양 속담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러나 악마는 거기 있지 않고 쟁점 법안을 강행 처리하는 데 필요한 국회 의석을 재석(在席) 과반수에서 재적(在籍) 5분의 3 이상으로 끌어올린 2012년의 국회 선진화법에 있다. ‘5분의 3’ 조항이 악마가 될 거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법의 통과를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여당 의석이 전체 의석의 5분의 3이 안 되는 현 상황에서 윈-루즈를 추구하면 바로 루즈-루즈로 이어진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유승민 원내대표는 야당과의 윈-윈을 도모하며 힘겹게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비록 미흡하긴 해도 이 개정안은 박근혜 정부 최대 치적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5분의 3’이라는 악마를 외면한 채 연금법 개정안을 포기하더라도 윈-루즈를 추구하라고 유 원내대표에게 훈수를 두고 있다. 탁상공론일까. 아니면 정치공세일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속담이 ‘악마는 훈수에 있다’로 바뀐 느낌이다.

지금의 메르스 사태가 엄중하긴 해도 시간이 지나면 진정될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의 탁상공론식 게임 인식은 앞으로도 계속 야당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와 국정 운영의 마비를 초래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청와대가 제3자적 태도의 윈-루즈 훈수에서 벗어나 윈-윈을 위한 환경 조성에 힘써야 한다.

구체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여야 지도부 인사들을 수시로 만나 소통하고 설득하도록 이병기 실장부터 직을 걸고 건의해야 한다. 베스트셀러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인 로버트 치알디니 교수는 소통과 설득을 위해서는 상대를 빚진 상태로 만들라고 조언한다. 박 대통령이 정책 성공의 공(功)을 자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게 돌려 그가 빚진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것도 윈-윈을 위한 좋은 전략이다.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외양간’을 제대로 못 고친 것 같다. 사후적으로 외양간을 고칠 때는 나 같은 교수의 훈수도 가끔은 쓸모가 있다. 부디 지금부터라도 윈-윈을 통해 국정 개혁을 이뤄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메르스#국회법#공무원연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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