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중고차 불법 주차장 된 ‘33억원 도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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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율현동 탄천 서측 도로 르포

서울 강남구 율현동에 건설 중인 ‘탄천 서측 도로’에 중고차 수백 대가 무단으로 주차돼 있다. 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많지만 관할 자치구인 강남구는 “주차 단속 권한이 없다”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서울 강남구 율현동에 건설 중인 ‘탄천 서측 도로’에 중고차 수백 대가 무단으로 주차돼 있다. 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많지만 관할 자치구인 강남구는 “주차 단속 권한이 없다”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차 사러 왔어요?”

10일 오전 승용차를 몰고 서울 강남구 율현동의 한 도로에 이르자 근육질의 건장한 남성 한 명이 손을 흔들며 가로막더니 이렇게 물었다. 기자가 “아니요”라고 답변하자마자 이 남성은 “차 보러 온 거 아니면 여기 길 없으니까 당장 차 빼세요”라며 소리쳤다.

그런데 남성의 등 뒤로 펼쳐진 아스팔트 도로에는 주차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많은 차량이 늘어서 있었다. 기자는 이 남성 몰래 도로를 우회해 들어가 주차된 차량을 헤아려봤다. 차량 240여 대가 이곳에 서 있었다. 경차부터 세단, 승합차까지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멀쩡한 도로를 주차장처럼 쓰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근처 ‘강남 자동차 매매시장’의 67개 중고차 매매상이었다.

원래 탄천변 뚝방길로 이용되던 이곳에 왕복 4차로 ‘탄천 서측 도로’ 공사가 시작된 건 2013년 5월. SH공사의 ‘세곡2공공주택지구’ 조성에 따라 입주민 편의와 서울 도심 진입을 위한 우회도로다. 사업비는 33억 원.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던 이 도로에 중고차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지난해 여름부터다. 4월 근처의 한 택시회사가 “택시 진입로 확보를 위해 이미 완공된 도로 1개 차로만 이용하게 해 달라”며 도로 개방을 요구한 게 발단이었다. 도로공사 시행자인 SH공사가 이를 수락하고 길을 터주자 엉뚱하게 중고차들이 ‘점령’ 한 것이다. 중고차 상인 A 씨는 “차는 많은데 근처에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다”며 “구청 단속도 없고 여기만큼 깨끗하게 차를 대 놓을 곳이 없어 불법인 걸 알면서도 주차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로가 대형 중고차 주차장으로 바뀌면서 그렇잖아도 삭막한 도로 근처 분위기는 더욱 악화했다. 자칫 우범지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곳을 자주 오가는 주민 B 씨는 “차가 빽빽이 서 있고 으슥하다 보니 밤이 되면 폭주족이나 불량배들이 모여 노는 경우를 봤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단속권한이 있는 강남구는 당장 단속을 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이다. 김구연 강남구 주차관리과장은 “아직까지 도로 고시가 안 된 상황이라 불법 주정차 과태료(4만 원)를 물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도로가 완공되는 올 10월 전까지는 계도 이외에 별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해명했다. 현재 도로 소유권을 갖고 있는 SH공사 측은 “자치구가 주차 단속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재산권 침해’ 등 다른 명목으로 경찰에 고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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