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재열]과학주의와 ‘비난의 정치’를 넘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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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아직도 메르스가 맹위다. 앞으로 반복될 미래형 위험의 묵시록으로 읽힌다. 올해 초 타계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주창한 ‘위험사회론’의 핵심은 ‘경계의 소멸’이다. 중동의 일로 여겨졌던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하고 불과 며칠 만에 한국의 주요 병원들을 초토화한 것은 과거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수년 전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산 채로 매몰케 한 구제역이나 그만큼 많은 수의 닭과 오리를 도살 처분케 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그리고 사스나 에볼라의 경험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종을 낳는 바이러스를 따라잡기 급급한 인류의 과학 지체를 절감한다.

메르스의 경우 대표적인 과학 잡지인 네이처와 사이언스의 전망이 엇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원인과 전파 위력에 관해 기존 지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불확실성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과학적 지식과 대중적 인식 간에도 심각한 격차가 발생하고, 그 격차만큼 사회에 노출된 위험을 다루는 방식들이 적나라하게 충돌하고 있다.

과학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의사들이나 전문가들은 메르스 바이러스의 전파력이 낮다는 점을 강조하고, 객관적 확률과 분포, 침착한 대응을 주문한다. 반면에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정부의 미진한 대응에 대해 질타하거나 부족한 시민성을 나무라는 ‘비난의 정치’가 난무한다. 한편 일부 시민들과 감염자들은 ‘될 대로 되라’는 운명론적 태도를 보인다. 일부 병원이나 기업들은 손익 계산에 따라 환자를 거절하는 ‘상인적 태도’를 보인다. 결국 메르스의 전파를 둘러싼 혼란의 바탕에는 이질적인 문화와 태도들의 충돌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하는 정부 정책의 준비성과 일관성인데, 아쉽게도 ‘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한 위험’을 다루는 원칙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 메르스 파고는 곧 마무리될 것이라 믿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과제들이 드러난다.

첫째, 전문가와 일반 시민 간에 위험을 인지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확률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반면 시민들은 정보를 단순화하고 개인적 경험의 문제로 인지한다. 객관적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전부 아니면 전무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이 가진 ‘우려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어 소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 ‘알 수 없는 위험’에 대한 고려다. ‘알려진 위험’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객관적 위험으로 보면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교통사고와 자살, 독감과 결핵 등이다. 그러나 일찍이 경험해 본 친밀한 위험이자, 인과관계가 이해 가능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에 시민들은 쉽게 수용한다. 반면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위험, 이해 수준도 초보적이고 언제 어디서 초래되었는지 모르는 위험은 쉽게 공포의 대상이 되며 또한 쉽게 정치화된다. 정책의 개방성과 투명성이 중요한 이유다. 위험의 성격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고 필요한 정보와 이를 다루는 방법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확실성과 오류에 대해서도 솔직해야 한다.

세 번째는 정부 개입과 건강한 규제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는 일이다. 시장의 실패에 대해 인정해야 한다. 민간병원만으로 메르스 같은 감염병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은, 용병만으로 국방을 담당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위험 제공자와 피해자가 다른 ‘외부성’의 효과가 큰 위험이 늘어날수록, 맑은 공기나 안전한 환경 등 공공재의 요소가 중요해질수록 정부와 공공 부문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책임과 권한의 비례성과 일관성이다. 전문가와 규제기관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되, 실패했을 때 확실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질병관리본부장에게 충분한 인력과 자원, 권한도 제공하지 않고 문제가 터지면 앞다투어 불러내고 야단치는 정치권의 모습은 볼썽사납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메르스가 보여준 진짜 위험, 그것은 세월호 이후로도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우리 시스템의 취약성이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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