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前 FRB의장이 주택담보대출 연장을 거절당했다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2일 10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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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흥미로운 외신 기사가 실렸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 연장을 받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버냉키 전 의장은 무슨 연유로 ‘퇴짜’를 맞은 걸까. 바로 중앙은행 수장이라는 정규직 공무원 신분에서 은퇴한 비정규직으로 신상에 변동이 생긴 탓이었다. 하지만 퇴임 후 그는 천문학적인 강연료 수입이 예상됐다. 은행에서는 비정규직 전환이라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대출 연장을 거절한 것이다. 어떤 은행원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렸을까. 버냉키를 대출 연장 부적격자로 판정한 건 사람이 아니었다. 은행 직원이 아닌 자동화된 시스템이 주범이었다. 이 일화를 두고 경영학계의 거장인 토마스 데이븐포트 미국 밥슨대 교수는 “컴퓨터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 왜 사람이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기술 진보로 인해 자동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 시장에서 사람이 설 자리는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역시 커지고 있다. 이런 예측의 기저에는 ‘노동=제로섬 게임’이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과연 그럴까. 데이븐포트 교수는 “‘자동화(automation)’는 위협이 아니라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기계로 인해 전통적인 일자리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오히려 새로운 분야의 일자리가 생겨 고용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은퇴 후 수백 만 달러의 강연료 수입 등이 예상됐던 버냉키 전 의장에게 퇴짜를 놓는 자동화의 오류를 잡아줄 수 있는 건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코리아 6월호에 소개된 데이븐포트 교수의 주장을 정리한다.

● 자동화, 위협일까 기회일까

기술 진보로 자동화가 진척되면서 일자리 감소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자동화로 인해 박탈당하는 업무의 수만큼 새로운 업무가 공급되지 않으면 경제 불황, 청년 실업, 개인의 정체성 위기 등 일자리 부족에 따른 온갖 사회적, 심리적 폐단이 심해 질 수 있다. 더욱이 요즘은 자동화가 인공지능의 형태로 지식 노동 영역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항공권 가격 검색 시스템부터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능형 시스템이 등장해 인간보다 신속하고 믿을만한 결정을 효과적으로 내놓는다. IT분야 전문 리서치업체인 가트너의 나이절 레이너는 “오늘날 경영진이 하는 일 중 상당수가 자동화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 던져볼 필요가 있다. “현재 인간이 수행하는 업무 중 기계가 대신하게 될 일은 무엇일까?”라는 물음 대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똑똑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 인간이 새롭게 성취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패러다임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 현재 지식 노동자들이 하는 업무 중 다수는 빠른 시일 안에 자동화될 것이다. 재무 상담 분야를 예로 들어 보자. 고객에게 최적의 주식·채권 포트폴리오를 추천하는 일은 향후 자동화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설 자리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는다. 의뢰인을 설득해 더 많은 돈을 투자하게끔 만들고, 더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이끄는 일은 컴퓨터로 쉽사리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불평만 하기 보다는 기계와 함께 일하며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현명하다.

● 올라서거나 비켜서거나 끼어들어라

컴퓨터보다 더 거시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추상적인 능력이 뛰어난 이들에게는 항상 일자리가 준비돼 있다. 이런 이들에겐 지적 수준을 한층 높여 컴퓨터 위에 ‘올라서는’ 전략이 최선이다.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종합적 사고 능력이 핵심이다. 오늘날 막대한 재력을 자랑하는 투자은행가와 헤지펀드 거목들이 성공한 비결 역시 자동화된 거래 시스템과 포트폴리오 관리 시스템 위로 올라섰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물론 ‘올라서는’ 전략은 탁월한 역량을 지닌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방법이다. 그렇다고 낙심할 건 없다. 기계 옆에 ‘비켜서서’ 함께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인관계 능력과 자기성찰 지능을 계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컴퓨터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며 자신만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애플의 존경받는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는 매일같이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해도 아름다운 디자인을 찾아내는 자신의 감식안을 절대로 컴퓨터에 맡기지 않는다. 아이브의 진정한 천재성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강점(감식안)을 찾아내 그것을 업무에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능력은 절대 컴퓨터 프로그램화가 불가능한 역량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올라서거나 비켜서는 것 외에 기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방법은 ‘끼어들기’다. 제2, 제3의 버냉키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려면, 컴퓨터가 하는 작업을 사람의 눈으로 감시하고 조정해야 한다. 세금 업무를 컴퓨터가 처리하는 비중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자동화 프로그램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를 잡아내려면 영리한 세무사가 그 과정을 잘 지켜봐야 한다.

● 인간과 기계의 연합이 더 강력하다

현대 사회에는 자동화를 최고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고, 세상은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고용주들은 기계와 인간을 상호 대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둘 중 하나가 더 비싸면 다른 하나로 교체하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어디까지나 정적인 상황, 즉 내일 닥칠 상황이 오늘과 똑같을 때에만 통하는 법이다.

혁신의 시대에는 인간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 인간이야말로 차세대 아이디어의 근원이자 사업에서 경쟁자가 가장 모방하기 어려운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변덕이 심해 예측할 수 없고, 이기심과 권태와 부정직함에 빠질 수 있으며, 가르치기 어려운데다 빨리 지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있는 긍정적인 특질을 최대한 활용하면 기업 고유의 경쟁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

이제 고용주는 인간과 컴퓨터의 연합이 각각 따로 일하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기억하자. 컴퓨터와 원활하게 바통을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들만이 최후 승자가 될 수 있다. 고용주와 직원 양쪽 모두에 장기적으로 통할 전략은 영리한 기계를 지식 노동의 동반자이자 협력자로 보는 시각이다.

정리=이방실 기자 smil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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