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인류 진화와 감염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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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인류의 진화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그림이 하나 있다. 네 발로 기고 있던 유인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마지막에 꼿꼿이 두 발로 선 인간으로 변하는 그림이다. 예전에는 학교에서도 이 그림을 배웠다. 그러면서 외웠다. 유인원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원인(猿人)으로 진화했고, 이후 네안데르탈인을 거쳐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됐다고.

요즘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영장류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네안데르탈인 이렇게 차례로 ‘변신’해 지금의 모습이 된 게 아니다. 다양한 인류가 진화 역사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원인과 네안데르탈인은 그 과정에서 나타났던 여러 친척 중 하나일 뿐이다.

갑자기 인류 진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다양한 인류가 700만 년에 달하는 진화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공존해 왔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고인류학자들이 지금까지 찾은 옛 인류는 20여 종에 이르며 이들은 대부분 몇몇 다른 종들과 등장 시기가 겹친다. 그러니까 옆 동네에 놀러 가면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제2, 제3의 인류가 살고 있는 풍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유독 한 종의 화석만 발견되는 시대가 있다. 지금부터 약 200만 년 전과 300만 년 전이다. 각각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하빌리스(손 쓴 사람)와, 가장 유명한 원인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살던 시기다. 이를 토대로 고인류학자들은 이 시기에 인류가 오직 한 종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3년 내에 발표된 연구 결과는 이런 생각을 바꾸고 있다. 2012년, ‘호모 루돌펜시스’라는 종이 ‘손 쓴 사람’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올해 3월에는 보다 이른 시기에 산 또 다른 신종 화석도 공개됐다. 원인도 마찬가지다. 5월 말 공개된 학술지 ‘네이처’ 논문에 따르면, 적어도 한 종 이상의 다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루시와 비슷한 시대에 아프리카를 활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결과는 현재의 특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현재 지구에는 오직 한 종의 인류만 살고 있다. 인구는 70억 명이 넘는데, 생명 역사에서 단 한 종의 대형 동물이 이렇게 많은 개체수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이럴 때 가장 염려되는 것은 감염병의 유행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한 번 치명적인 병이 돌기 시작하면 대응이 어렵다. 도미노 게임을 생각하면 쉽다. 중간중간 넘어지지 않는 다른 모양의 패가 섞여 있어야 쓰러지기를 멈출 수 있는데, 주변이 온통 똑같은 패면 전부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다.

물론 인류의 번성은 지역에 따른 유전적 다양성을 낳기도 하고 적응력을 바꾸기도 한다. 고산지역에 적응하는 유전자가 그 예다. 감염병에 더 강하거나 반대로 더 취약한 사람도 나올 수 있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두고 한때 “한국인이 메르스에 더 취약한가”라는 추측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메르스에 관한 한, 아직 그런 증거는 없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번 사태의 원인을 인류가 개발한 더 간편하고 즉각적이며 위력적인 적응 체계, 즉 문화적 적응이 실패한 데에서 찾는다. 의료와 위생이다. 시원하고 쾌적한 의료 환경은 역설적으로 서늘하고 건조한 환경을 선호하는 바이러스의 활동을 부추겼고(메르스는 중동의 겨울과 봄에 활발히 퍼진다), 보건당국은 우왕좌왕하느라 바이러스에게 도미노를 시작할 시간을 벌어줬다. 최소 1000년이 걸리는 유전적 적응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의료 대응체계가 빨리 제자리를 잡아야 하는 이유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인류 진화#감염병#문화#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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