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아버지의 일생을 마주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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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신작 연극 ‘허물’

연극 ‘허물’의 한 장면. 각 나이대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들과 아들을 비롯한 출연 배우 전원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연극 ‘허물’의 한 장면. 각 나이대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들과 아들을 비롯한 출연 배우 전원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부모가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자녀의 성장 과정을 기억하듯, 자녀도 어린 시절 그 누구보다 강해 보이던 부모의 젊은 시절부터 백발의 노인이 된 모습까지 눈으로, 가슴으로, 머리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약해지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과거 젊고 패기 넘치던 그들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우리의 기억 속에 전성기의 부모 모습이 저장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연극 ‘허물’은 이 점에 착안해 40대의 아들 다쿠야가 80대 노인이 된 아버지의 ‘역(逆)성장기’를 관찰하며 과거의 아버지를 마주한다. 국내 초연작으로 국립극단의 젊은 연출가전 시리즈로 선보였다.

우체국에서 일하던 다쿠야는 한창 잘나가야 할 시기에 불륜이란 실수로 모든 걸 잃은 인물이다. 대학 동창생과의 불륜으로 안정된 직장을 잃고 아내도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도 충격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49재 때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요리술을 나눠 마신 것을 계기로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체험하게 된다.

단 6일간의 시간 동안 다쿠야는 하루 간격으로 치매에 걸린 80대 아버지부터 따뜻했던 60대 아버지, 직장인으로선 높은 신분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던 50대 아버지, 여자를 좋아하며 한량 같은 삶을 살았던 40대 아버지, 꿈과 희망에 부풀었던 30대 아버지, 다쿠야가 태어나기도 전이었기에 전혀 만나 볼 수 없었던 20대와 10대 시절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들이 하루 사이에 10년, 20년 젊어지는 비결은 바로 ‘허물’에 있다. 곤충이 허물을 벗듯, 노화된 몸을 허물처럼 벗어내고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아버지’ 캐릭터지만 외모상 통일성이 없는 배우 6명이 나이대별 아버지로 등장한다. 헌데 서로 다른 외모만큼이나 각 나이대 아버지들은 성격도, 가치관도, 성숙함도 큰 편차를 보인다. 그래서 서로 다른 6명의 배우가 단 한 명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6명의 아버지 중 80대 아버지를 맡은 임홍식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그의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리얼리티’를 물씬 느끼게 한다. 아버지가 첫 허물을 벗기까지 초반 20분가량이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는 점이 아쉽지만 신예 연출가 류주연은 전체적으로 2시간 15분의 극을 유쾌하게 끌고 간다. 14일까지 서울 용산구 청파로 국립극단 소극장 판. 1만∼3만 원. 1588-5966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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