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보, 작지만 빠르고 강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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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뚫기-계단오르기 등 8가지 임무 44분만에 거뜬히
美 재난로봇 경연대회 우승

휴보(HUBO)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벽에 붙어 있는 선반에 여러 종류의 드릴이 놓여 있었다. 이 가운데 전동드릴을 바닥으로 툭 밀어 떨어뜨렸다. 휴보의 전략이다. 손에 꼭 맞는 모양의 다른 전동드릴을 집는 데 방해가 되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어 ‘징∼’ 하는 드릴 소리와 함께 벽에 구멍이 뚫렸다. 이로써 8단계 임무 중 절반을 넘어 5번째인 ‘벽 뚫기’도 성공이었다. 벽 뚫기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고 로봇들의 실수도 많아 출전 팀들에 최대의 난제였다.

휴보가 마지막 관문인 계단 오르기에 도전했다. 마지막 계단을 사뿐히 밟는 순간 ‘팀카이스트(Team KAIST)’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재난로봇 경연대회 ‘다르파 로보틱스 챌린지(DRC)’ 결선 경기를 보기 위해 6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퍼모나 시의 ‘페어플렉스’ 전시장에 모인 관중도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8개 임무를 모두 마친 시간은 44분 28초. 참가팀 가운데 가장 빨랐다. 첫날인 5일 58분 동안 8개 임무 중 7개만 성공해 6위에 머물렀으나 단숨에 1위로 점프했다. “너무 떨려서 휴보를 직접 못 보겠다”며 다른 곳에 있던 ‘휴보의 아버지’ 오준호 KAIST 휴머노이드로봇연구센터장은 그제야 얼굴을 펴고 휴보에게 걸어갔다.

2위를 차지한 미국 팀 ‘IHMC 로보틱스’의 한 연구원은 직접 휴보팀을 찾아와 “우리 로봇은 너무 크고 무거운데, 휴보는 작고 강력하다”면서 휴보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IHMC 로보틱스의 ‘아틀라스(Atlas)’는 190cm에 175kg으로 키 168cm에 몸무게 80kg인 휴보보다 약 2배 무겁다. 아틀라스는 8점 만점을 기록했지만 휴보보다 6분가량 뒤진 50분 26초 만에 임무를 마쳐 2위에 머물렀고, 미국 ‘타르탄 레스큐(TARTAN RESCUE)’ 팀의 로봇 ‘침프(CHIMP)’ 역시 8개 임무는 모두 성공했지만 55분 15초로 시간 싸움에서 져 3위를 기록했다. 휴보를 포함한 참가 로봇들은 8단계의 임무 중 일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고 일부는 연구진의 원격조종으로 과제를 수행했다.

휴보의 성공은 안정성을 높인 로봇 기술에서 나왔다. 오 센터장은 “하체 힘이 좋아야 걸을 때 안정성이 있다고 판단해 다리에 ‘슈퍼 커패시터(대용량 축전기)’를 부착했다”면서 “전기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내보내 강한 힘을 낼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정강이와 발밑에 바퀴도 달았다. 두 발로 걷다가 무릎을 꿇으면 자동차처럼 바퀴로 움직일 수 있도록 ‘변신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권인소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팀이 개발한 시각처리 프로그램을 휴보에게 이식해 휴보가 카메라와 레이저로 주변을 촬영하면 이 데이터를 더욱 정확하게 처리하도록 했다.

2004년 휴보가 한국의 첫 인간형 로봇으로 알려졌을 때만 해도 일본의 대표적인 인간형 로봇 ‘아시모’와 자주 비교됐다. 당시 아시모는 시속 3km로 걷고 골프 퍼팅까지 하는 반면 휴보는 기본적인 보행만 가능한 초보적인 수준의 인간형 로봇이었다. 일본은 아시모를 선두로 세계 최고의 로봇 강국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일본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산업기술종합연구소의 로봇 ‘HRP 2’가 10위를 기록한 게 최고 성적이다. 도쿄대 팀은 11위에 그쳤다.

심옥기 KAIST 연구원은 “첫날 벽 뚫기 단계에서 전동드릴의 날이 부러지는 불운을 겪었는데, 이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면서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밤잠을 포기하고 계속 연습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퍼모나=전승민 동아사이언스기자 enhance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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