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의 법과 사람]메르스 확산 막을 ‘우문현답’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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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논설위원
최영훈 논설위원
2003년 2월 중국과 홍콩에서 폐렴과 비슷한 괴질이 돈다는 소문이 퍼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그해 3월 이 괴질에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건 국무총리는 사스 환자를 치료하던 홍콩 의사가 숨졌다는 보도를 보고 이 사안을 직접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사스도 현장에 답이 있었다

고 총리는 4월 23일 관계기관 차관회의를 열었다. 보건복지부가 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방역대책본부를 가동하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전담 인력은 4, 5명에 불과했다. 그는 이틀 뒤 인천국제공항으로 갔다. 사스 발생지인 홍콩에서 온 항공기 입국장과 채혈 조사 현장을 살펴봤다. 현장을 다녀오니 사태가 더욱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부를 통해 군 의료진까지 동원했다.

사흘 뒤 고 총리는 사스 관계 장관회의를 열고 의심환자를 10일간 강제 격리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했다. 의심환자는 나왔지만 확진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해 WHO는 우리나라를 ‘사스 예방 모범국’으로 평가했다.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을 중시하는 고 총리의 행정 스타일과 예민한 촉각이 사스 방역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사스 진압 후인 2004년 1월 출범한 질병관리본부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 사태로 도마에 올랐다. 최초 환자의 증상과 중동 국가 방문을 평택성모병원에서 통보받고도 이틀을 허비했다. 초기 대응 실패로 2차 감염을 막을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질병관리본부 조사요원이 ‘우문현답’ 차원에서 최초 환자가 치료받은 병원을 가봤더라면 환기가 안 되는 시설을 통해 같은 병실, 같은 층 환자와 간병을 하는 가족 등 20여 명에게 번질 위험을 간파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사는 임상검사 위주로 진행됐다. 서너 명의 감염자에서 그칠 것이라던 초기 예상은 무참하게 빗나갔다.

메르스 같은 신종 감염병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국립보건원을 개편해 14개 국립검역소를 산하에 둔 기구가 질병관리본부다. WHO는 지난해 5월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각국에 메르스 확산을 경고하고 방역 대책 강화를 통보했다. 그러나 질병관리본부는 메르스를 법정 감염병으로 등록하지 않았다. 사전 대비의 부실이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이어져 부실 대응을 낳았다. 12년 전 사스 대응 때와 너무 대조적이다.

부실 시스템 믿고 넋 놓았나

질병관리본부에는 감염병 전문의가 없고 초기 환자 역학조사를 담당하는 인력도 14명에 불과했다. 인력 예산 역량이 모두 부족하다 보니 물샐틈없는 방역망을 쳐서 수사하듯 감염 확산을 차단하지 못한 것이다.

정부는 이런 질병관리본부에 메르스 대책을 일임해놓고 한동안 위부터 아래까지 손을 놓고 있었다. 총리 대행을 맡은 최경환 경제부총리나 황우여 사회부총리는 복지부에 모든 것을 맡겨놓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채근하자 움직였다. 굼뜬 대응의 책임은 결국 박 대통령이 져야 한다.

고 전 총리는 “초기의 심각성을 놓친 것이 제일 큰 문제다. (질병관리본부 같은) 대응 시스템을 만든 것이 잘못인지…”라며 혀를 찼다. 첫 확진 판정이 나왔을 때 바로 범정부 차원의 대응을 하지 않은 무신경한 뒷북 행정을 지적한 것이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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