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응준]지금 우리에게 신문맹인이란 무엇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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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소설가
이응준 소설가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상황과 환경을 구축해 늘 거기에서 거기일 뿐인 인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지배한다. 가령, 호황과 창궐을 누리던 직업들이 문득 사라져 버리고 상상조차 못했던 직업들이 갑자기 나타나 밥벌이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투덜거려 봤댔자 갈수록 곤궁해지는 쪽은 그렇게 징징거리고 있는 당사자일 뿐이다. 그러나 진보까지는 아닐지라도 안정과 개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흘러간 세월로 잠시 귀 기울여 오늘의 거울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 내는 것이 꼭 손해 볼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처음 내 글이라는 것을 세상에 내놓을 당시만 하더라도 실력과 재기가 번득임에도 불구하고 등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선배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는 신춘문예 결심에 올라온 수제자의 작품을 발견하고는 일부러 탈락시키곤 하는 선생님들이 계신 까닭이었다. 재주만 승해 데뷔를 하면 오래 못 가 제풀에 좌초될 것을 우려하는, 글을 쓴다는 것에는 비단 기술적이 측면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예술가로서의 자세가 무르익어야 한다는 스승의 준엄한 경계(警戒)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런 강직한 훈도가 안 좋은 결과를 낳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래 혹독하게 수행한 글쟁이가 오래 훌륭하게 남았다. 비인부전(非人不傳), 즉 인간 됨됨이가 갖춰져 있지 않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줄 수 없다는 깐깐함이 요즘 세태에는 고리타분한 헛소리로 받아들여질 게 빤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불과 이십여 년 전 한국 문인들의 품격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문학의 시대에 그러한 문인들을 대중은 기꺼이 존경했다.

젊은 나이에 다른 꿈을 좇아 문학 전임교수를 때려치운 지도 어느덧 딱 십 년째다. 그 사이 정신없이 요동치는 세상을 따라 나 역시 많이 휘둘리고 깎여 나갔지만 이런 시대에도 소설과 시 쓰기에 대해 고민을 상담해 오는 문학청년들을 가끔 사석에서 만나게 된다. 대개는 쓴웃음으로 그 자리를 피하곤 하지만, 실은 내가 해주고픈 충고란 요컨대 고작 이런 것이다.

요즘은 누구든지 개인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글을 올려 버리는 가공할 자신감과 광기에 가까운 습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능력을 함양하고자 하는 이라면 아직은 미숙한 자신의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진정한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과거 우리의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글이 발표되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중은 그러한 작가정신을 흠모함으로써 자신의 소박한 문장을 되돌아볼 줄 아는 아름다운 교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작가들의 글은 한낱 철지난 상품이 돼 버리고 그런 작가들을 자신의 분신보다 열등하게 여기는 대중들의 문장은 변기 모양의 흉기다. 이것은 21세기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간단히 얼버무리고 넘어갈 카오스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실질문맹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하위라는 보도에 우리는 부끄러워할 자격조차 없다.

대한민국의 근대가 여태 미완성인 만큼 대한민국의 언어는 아직 한참 미완성이고, 이것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의 수준이 된다. 글이 그 내용과 형태의 가치를 담보할 때까지 스스로 감추고 기다리는 태도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법일진대 이 당연한 사실을 작가와 대중이 모를 때 그 사회는 언어의 무간지옥 속에 갇힌다.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 꼴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본다. 국회의원들의 수준을 알고 싶은가? 국회의원들이 작문을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보좌관들이 대신 써주지 않을 때 말이다. 국민들의 수준을 알고 싶은가? 그 국민들이 평소 어떤 글을 서로 나누고 있는지 보면 안다. 물론 그 국민들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려는 목적으로 태어난 괴물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모더니스트임을 자부하며 양주를 마시고 바를 나서다 서울의 비포장 진창길에 절망하던 시인 김수영을 그 진창보다 더 괴롭힌 것은 시구가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로 떠오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국어의 행복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대한민국은 신문맹인(新文盲人)들이라는 새로운 야만인들의 국가다. 과연 우리 중 누가 저 1960년대의 고독한 시인 김수영의 고통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이응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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