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남성 중심 할리우드서 여성의 아름다움 아닌 당당한 상업성으로 살아 남았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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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린 비글로: 젠더를 넘어서/피터 커프 엮음·윤철희 옮김/424쪽·1만7000원·마음산책

캐스린 비글로의 세 번째 장편 ‘블루 스틸’(1989년). ‘폭력의 매력’에 대한 감독의 애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극한의 위기에 처한 뒤 전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동기를 얻는 여성의 심리를 액션에 녹여냈다. 철저히 상업적으로. 마음산책 제공
캐스린 비글로의 세 번째 장편 ‘블루 스틸’(1989년). ‘폭력의 매력’에 대한 감독의 애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극한의 위기에 처한 뒤 전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동기를 얻는 여성의 심리를 액션에 녹여냈다. 철저히 상업적으로. 마음산책 제공
인터뷰를 진행하다 빈번히 겪는 난감한 상황. 대상물과 창작자의 불일치다.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만든 이의 답변이 어눌한 쪽은 그나마 좀 낫다. 한심스러운 내용인데 인터뷰이가 달변일 경우 위험한 유혹이 다가든다. 기사를 재미있게 쓸 수 있겠다는 유혹이다. 여러 번 굴복했다.

책의 원제는 그냥 ‘Kathryn Bigelow: Interviews’. 표지는 한가득 덩그러니 비글로의 얼굴뿐이다. 반칙이다. 영화 팬이라면 그것만으로 일단 집어 든다. 요리로 치면 잘 숙성된 채끝 등심 덩어리를 재료로 한 아름 확보한 셈이다. 28년 전 두 번째 장편인 뱀파이어 웨스턴 ‘죽음의 키스’를 내놓은 뒤 시카고트리뷴과 짤막하게 진행한 ‘유망주 인터뷰’부터 최근작 ‘제로 다크 서티’(2012년) 기자회견까지, 비글로가 스크린이 아닌 자신의 입을 통해 내놓은 문장을 모아 순서대로 엮었다. 자판을 두드리며 필자들이 누렸을 저릿저릿한 즐거움의 흔적이 잘 익힌 스테이크 육즙처럼 행간마다 흥건하다. 고밀도의 창작물, 그 완성도에 부응하는 명민한 달변의 창작자를 동시에 만날 때 경험하는, 드문 즐거움이다.

아카데미는 2010년 82회째를 맞아서야 처음으로 여성에게 감독상을 안겼다. 작품상 각본상 음향효과상까지 휩쓴 ‘허트 로커’의 감독 비글로는 글로벌 흥행작 ‘아바타’를 연출한 전남편 제임스 캐머런의 박수를 받고 오른 단상 위에서 자신이 ‘여성 감독’임을 암시하는 문장을 내놓지 않았다. 엮은이가 서문에 밝혔듯 그는 자신을 여성 감독으로 규정하길 일관되게 거부했다. 장르 관습에 대한 기대를 전복하는 상업영화를 통해 그는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에서 성별과 무관한 차별성을 구축했다.

역설적으로 비글로는 아름답다. 헝클어진 채 대충 훑어 넘긴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헐렁한 청바지에 펑퍼짐한 재킷. 자신을 향한 뷰파인더를 꿰뚫듯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어떤 여배우보다 매력적이다. 또한 ‘오스카 감독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은 비글로의 희망과 무관하게 그에 대한 기본 정보가 됐다. 그 정보와 비글로의 외모 덕에 이 책은 서점에서 ‘상품성’을 얻는다.

“내 창조적 욕구를 충족하겠다고 돈을 요구할 수는 없어요. 나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어요.”

37세 때 주류에 한발 더 접근해 매혹적 액션영화 ‘블루 스틸’을 만든 뒤 가진 인터뷰는 그가 처음부터 눈앞의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했음을, 시종 철저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상업적’이었음을 알려준다.

“미술을 공부했지만 영화가 정치적으로 더 올바르다고 판단했어요. 영화는 끈질기게 버티면서 기다리는 게임이에요. 어떻게든 살아 있으려고, 굴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죠. 처한 상황을 이겨내는 게 그냥 일상이에요. 계속 글을 써야죠. 도박을 하듯이.”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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