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로 체력 키우는 日… ‘수출 빙하기’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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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없는 수출한국]<下>신흥국 수요감소 - 엔低의 덫

한국 수출이 엔화 약세로 인한 가격경쟁력 저하, 신흥국 통화 약세와 경기 부진으로 인한 수요 감소, 중국 후발업체들의 추격이라는 삼중고에 처했다. 특히 일본 업체들은 최근 엔화 약세로 얻은 영업이익을 대거 연구개발(R&D)과 설비 증설에 투자하고 있다. 일본 경쟁사들이 제품경쟁력과 효율성 등 기초체력을 키워 ‘포스트 엔저 공습’을 시작하면 한국 수출이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日 업체 가격인하 본격화

소니는 지난해 11월부터 미국 유통점 베스트바이 등에서 2799달러(약 310만 원)에 팔던 65인치 발광다이오드(LED) 3차원(3D) 초고화질(UHD) TV를 800달러 할인해 1999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서 소니는 가격 인하에 인색하기로 유명하지만 엔저를 등에 업고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싱가포르에서는 일본 업체들이 중저가 휴대전화를 중심으로 가격을 인하하고 있다”고 말했다.

4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일본 은행 통계를 분석한 결과 일본의 수출물가는 지난해 4분기(10∼12월)부터 본격 낮아졌다. 일본 수출물가지수는 2010년을 100으로 봤을 때 지난해 1∼3분기(1∼9월)까지 98.0∼98.9를 유지하다 4분기 96.7, 올해 1분기(1∼3월) 94.1로 낮아졌다. 2010년에는 해외에서 100엔에 팔던 걸 올해는 94.1엔에 판다는 뜻이다.

홍성일 전경련 재정금융팀장은 “엔저 지속 여부가 불투명했던 지난해 중순까지는 일본 업체들이 가격 인하보다 수익성 보전에 주력했지만 이제 공격적 가격 인하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해석했다.

신흥국 통화 약세가 경기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수출기업들은 새로운 수요를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실적발표에서 “환율로 8000억 원(영업이익 기준)의 ‘부정적 영향’을 입었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남미 등 신흥국의 경기 부진으로 TV와 가전제품의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분기 CE(생활가전) 부문은 1400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쌍용자동차는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자 1월부터 수출을 잠정 중단했다. 이에 따라 쌍용차 1분기 전체 수출 대수는 1만1808대로 지난해 1분기(1만9874대)보다 40.6% 급감했다.

○ 포스트 엔화 약세와 중국의 공습 대비해야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일본 기업들이 환차익을 가격에 반영해 시장점유율을 늘리는 전략과 함께 수익성 극대화 및 투자 확대에 활용해 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엔고 국면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219개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올해 회계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 설비투자 계획을 조사한 결과 총투자액은 지난해보다 10.5% 증가한 28조226억 엔(약 249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준호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연구위원은 “도요타 혼다 마쓰다 등 7개 일본 자동차업체는 지난해 회계연도에 엔저에 따른 환차익 5320억 엔 중 24.2%(1287억 엔)를 연구개발비 증액에 투입했다”며 “올해 발생할 환차익의 일부도 R&D 재원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미 미국 자동차시장에서는 일본 업체들이 인센티브를 줄이는 추세다. 트루카닷컴에 따르면 현대자동차의 차량 한 대당 지급되는 인센티브 평균금액이 지난해 12월 1731달러에서 4월 2710달러로 증가한 반면 도요타는 1965달러에서 1757달러, 혼다는 2241달러에서 1787달러, 닛산은 3672달러에서 2546달러로 줄었다. 이에 지난달 현대차의 미국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10.3% 줄어든 것이 엔저 공습보다 신차와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픽업트럭 부재, 품질 등 근본 경쟁력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국 산업도 위협 요인이다. 최근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중국의 무역구조를 원·부자재를 들여와 제품을 생산한 뒤 다시 수출하는 가공무역이 아닌 좋은 기술을 선별적으로 들여오고 우수한 제품을 수출하는 부가가치 제조업으로 바꿔나가겠다는 의미로 “중국의 무역 전략은 ‘대진대출(大進大出)’에서 ‘우진우출(優進優出)’로 바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중국 토종 자동차업체인 창안자동차는 2025년까지 자동차 판매 600만 대, 중국 시장 점유율 14% 등을 통해 글로벌 판매량 순위 10위권에 진입하겠다는 비전을 3월에 제시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 업체들은 금융위기 때 수요가 줄자 설비를 늘리는 대신 연구개발에 투자해 근본적인 경쟁력을 높였지만 국내 기업들은 금융위기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빨리 빠져나오면서 매출 증대에 주로 역량을 투입했다”며 “근본적인 경쟁력 제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강유현 yhkang@donga.com·정세진·황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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