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녹색절경… 천근만근 발걸음이 어느새 콧노래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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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와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숲 길’]
만화가 허영만 화백, 경북 영주 소백산 자락길 트레킹

《 만화가 허영만 화백(68)은 식탐이 많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주변 친구들은 “밥 먹을 때 허영만 앞에 앉지 마라”라고 농담을 한다. 허 화백이 친구들의 밥까지 뺏어 먹는다는 것이다. 왕성한 식욕과는 다르게 허 화백의 배는 요즘 홀쭉하다. 배와 허리띠 사이로 주먹 하나가 넉넉하게 들어갈 정도다. 나이를 의식해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식사량을 크게 줄였다고 한다. 지난달 26일 풍경 좋기로 소문난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일대 소백산 자락길을 찾은 허 화백은 전날 음식을 잘못먹고 배탈까지 나 핼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백산 자락길의 절경은 허 화백에게 다시 생기를 찾게 했다. 소백산 자락길은 소백산을 감아 도는 길이다. 모두 12자락 길로 이루어졌다. 이날 찾은 곳은 그중에서도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인기 높은 1자락길이다. 소수서원 등 조선시대 선비들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이 있고, 우거진 숲과 계곡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예로부터 소백산은 사람 살리는 산이라고 했다. 뛰어난 경치와 맑은 공기 속을 걷다 보면 생기를 되찾는다는 의미다. 》

허영만 화백(왼쪽)과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함께 경북 영주시 소백산 자락길을 걷고 있다. 소백산 자락길은 숲이 우거지고 경관이 좋아 생태 탐방로로 이름이 높다. 허 화백은 고 박영석 대장을 따라 험준하기로 유명한 히말라야 K2에 다녀오는 등 산악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주=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허영만 화백(왼쪽)과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함께 경북 영주시 소백산 자락길을 걷고 있다. 소백산 자락길은 숲이 우거지고 경관이 좋아 생태 탐방로로 이름이 높다. 허 화백은 고 박영석 대장을 따라 험준하기로 유명한 히말라야 K2에 다녀오는 등 산악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주=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좋은 술을 함께 마시고 싶은 아버지

삼괴정로 등산로 주차장에서 소백산 자락길 초입으로 들어서니 고개가 자동으로 우측으로 돌아갔다. 길게 펼쳐진 사과나무 밭이 절로 침을 돌게 한다. 하얀 사과꽃이 산을 뒤덮었다.

경북 영주는 사과의 명산지다. 영주산 사과는 ‘꿀사과’로 부를 만큼 당도가 높다고 한다. 배탈 때문에 힘들어했던 허 화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먹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사람의 욕구 중에서 식탐을 참는 게 가장 어렵죠.”

허 화백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가 ‘식객(食客)’이다. 본인이 꼽는 자신의 최고작이기도 하다. 전국 곳곳 산해진미를 찾아나서는 미식가의 여정을 만화로 풀어냈다. 동아일보에 2002년 9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1438회에 걸쳐 연재했다. 연재가 끝나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또 27권의 책으로도 출간됐다.

“식객을 끝까지 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100권 정도까지 내야 했는데….”

식욕을 절제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만화 ‘식객’의 주인공 성찬이처럼 새로운 맛을 찾아 나서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했다. 음식 맛이 좋다는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음식 솜씨가 좋은 어머니 품에서 자란 그는 음식 찾아다니는 일을 운명처럼 대하는 것 같다.

“식성도 변합디다. 요즘엔 냉면에 빠졌어요. 냉면 한 그릇과 빈대떡을 안주 삼아 소주 마시는 재미가 쏠쏠해요.”

커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인터넷에서 ‘커피 한잔할까요’를 연재하고 있다. 1974년 ‘집을 찾아서’로 만화가의 길에 나섰던 그의 만화가 인생 40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카페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과 커피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허 화백 특유의 진솔한 화법으로 풀어냈다.

사실 허 화백은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그는 “최근 커피를 두 잔 마셔 봤는데 가슴이 벌렁거리더라. 그래도 작업 때문에 커피를 가까이하고 있다. 인스턴트커피에 먼저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커피 초보자지만 커피 만화에 대한 열정은 뜨겁다. 작품에서 진한 아메리카노 향이 느껴지기를 기대한다. 모르는 게 오히려 약이 됐다. 다양한 학습을 통해 커피의 세밀한 내용까지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낚시 만화를 20년 동안 그려 히트를 친 만화가가 있는데 낚시를 전혀 못 한다고 합니다.”

소백산 1자락길에 있는 죽계구곡(竹溪九曲)은 초암사 앞 제1곡을 시작으로 제9곡까지 약 2km에 걸쳐 흐르는 계곡이다. 퇴계 이황 선생도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했다고 한다. 소백산 1자락길은 죽계구곡을 따라 나 있다. 경쾌한 물소리를 내는 계곡과 주변의 소나무, 참나무 고목의 푸름과 향긋함이 오감을 자극한다.

6곡은 선녀들이 목욕하고 갔을 정도로 물이 맑다고 해서 목욕담(沐浴潭)으로도 불린다. 상수도보호구역이라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계곡물이 누군가와 함께 발 담그고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목욕담을 지나던 허 화백도 같은 마음인 듯했다.

“작년에 매실주를 3통이나 담갔는데 다 마셨어요. 여기에 오니 올해 매실주를 더 많이 담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매실주는 허 화백으로 하여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술을 더 담그겠다는 말이 아버지를 더 추억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허 화백의 부친은 경찰관이었다고 한다. 경찰을 그만 둔 뒤에는 여수에서 그릇 도매상과 멸치 어장을 운영했던 사업가였다. 부친은 1990년대 중반 작고했다.

“아버지는 꼭 식전주로 매실주를 한 숟가락 드셨죠. 대학을 안 보내 준 것 외에는 아버지에게 아쉬운 점은 없습니다. 노느라고 바쁘신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 만화가가 될 수 있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주신 것 같아요. 살아 계신다면 좋은 술친구가 됐을 텐데….”

허영만 화백이 함께 트레킹에 나선 일행과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고있다.
허영만 화백이 함께 트레킹에 나선 일행과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고있다.
○ “박영석 대장이 ‘형님’ 하고 찾아올 것 같아”

죽계구곡을 거쳐 초암사에 다다르니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카시아 향기는 은은하게 풍겼다. “인간도 이런 향기가 나야지. 썩은 냄새만 진동하니…”.

달밭골에 이르니 허 화백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산악인 박영석 대장과의 추억을 꺼냈다. 달밭골은 한자로 월전곡(月田谷)이다. 완만한 경사지에 잘 정리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예로부터 밭 위로 달이 잘 비친다고 해 달밭으로 불렸다.

허 화백은 2001년 박 대장과 히말라야 K2(해발 8611m)에 함께 다녀온 뒤부터 가깝게 지냈다. 허 화백은 2002년 오세아니아 최고봉 카르스텐스(해발 4884m·인도네시아)와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해발 5642m·러시아) 정상에 오르며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허 화백 원작의 영화 ‘타짜’의 한 장면에 박 대장이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2011년 10월 허 화백은 절친하던 박 대장을 잃었다. 박 대장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해발 8091m) 등반 도중 실종되자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오열하며 그를 찾아다녔다. 그는 이후 4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박 대장의 숨결을 느낀다고 했다. “요즘 영석이가 자주 생각나요. 작업실에 있으면 영석이가 ‘형 소주 한잔해요’라며 터벅터벅 들어올 것 같아요.”

○ 다음 작품은 돈의 세상 그리고 싶어

더위를 싫어하는 허 화백의 봄, 여름 머리 스타일은 짧은 스포츠형이다. 세수할 때 얼굴과 머리를 동시에 씻으면 시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레킹의 마지막 코스인 비로사에 이르자 차가운 물로 땀을 격정적으로 씻어냈다.

허 화백은 달콤함으로 말을 꾸미기 싫어한다. 직설적인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고 순수하다고 본다. “저는 단것을 싫어해요. 설탕 싫어합니다. ‘단 거’를 알파벳으로 소리 나는 대로 쓰면 ‘Danger(위험)’ 아닌가요. 단 거는 위험한 놈입니다. 하하.”

만화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화에 대한 비상식적 규제를 느낀 적도 여러 번이다. 그의 말이 거칠어졌다.

“과거 도서잡지윤리위원회가 있던 시절에는 거기서 도장을 찍어 주지 않으면 책을 내지 못했죠. 복싱 만화에 3페이지 이상 싸우는 장면이 있으면 폭력성이 강하다고 지적하던 시절이었죠. ‘각시탈’이 나온 지 넉 달 만에 히트를 쳤는데 위원회에서 부르는 겁니다. ‘당신 때문에 모든 작가가 탈 만화만 그린다’고요. 원조 작가가 그만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각시탈도 중단됐죠.”

어려움을 이겨 내고 그는 한국 만화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하지만 겸손했다.

“이현세 작가님과 라이벌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3∼5등만 하면 된다는 사람입니다. 잘리지 않고 늘 만화를 그리고 싶을 때 그릴 수 있는 위치에만 있으면 만족해요.”

민족주의자, 권투선수, 도박 고수, 만년 대리, 세일즈맨 등 다양한 인물을 작품 속에서 자신의 분신으로 키워 온 허 화백의 소재 선택 기준은 ‘재미’라고 했다.

“프로레슬러 ‘박치기왕’ 김일 선생님의 만화를 그리자는 제안이 왔는데 과연 내가 재미있게 빠져들 수 있을까 확신이 없어 거절한 적이 있었죠.”

그 대신 정교한 관찰을 위해 취재에 많은 공을 들인다. 그는 항상 노트를 들고 다닌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허 화백은 “노트가 가방에 있는데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일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소백산 자락길이 좋았다는 말로 들렸다.

허 화백의 다음 작품은 ‘돈’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은행에 다니는 사위와 얘기하다 보니 돈을 벌고 쓰고 잃는 인간들의 모습이 재밌더라고요. 사위한테 많은 도움을 받으려고 해요.”

트레킹을 마친 허 화백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저 다시 태어나면 가수 할 겁니다. 한 곡만 히트해도 평생 먹고살지 않나요. (다시 태어나고 살아가려는) 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역시 인간의 마지막 치유 장소는 산, 자연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주=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소백산#허영만#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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