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한 마리’가 ‘개 한 마리’로… 온라인 가짜詩에 진짜가 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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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떠도는 유령시-엉터리시

《 인터넷에 판치는 ‘유령시’와 ‘엉터리시’ 때문에 시인들이 고통 받고 있다. 시인이 쓰지 않은 유령시가 시인의 이름을 훔쳐 진짜 행세를 하고, 원래 시와는 다른 오타 투성이 엉터리시가 온라인에 떠돈다.》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당신들에게 난 지금 말해야겠다/사랑의 크기를 시험하는 당신은 사랑할 자격이 없다/사랑하지 말거라/당신들은 흉터만 남길 뿐이다/그리고 사랑에 힘겨워 울고 웃는 자들이여/그렇게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제목의 시 일부다. 작자는 ‘정호승’으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호승 시인의 시가 아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정 시인의 시 ‘그리운 부석사’의 시구다. ‘그리운 부석사’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로 시작한다. 인터넷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정호승 시인과 아무 상관없는, 작자 미상 정체불명의 시다.

정 시인의 이름을 훔친 시는 한두 편이 아니다. ‘바람이고 싶어라/그저 지나 가 버리는’이란 구절로 시작되는 ‘바람이여’란 시도 작자가 정호승 시인으로 돼 있지만 실은 유령시다. 정 시인은 “‘이 시는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란 댓글을 인터넷 게시글에 달지만 시를 삭제해주는 사람이 없다”며 “이런 가짜 시에 ‘정 시인이 사랑을 수없이 운운하는 유치한 시를 쓴다’며 비평까지 달리니 무척 속상하다”고 밝혔다.

온라인의 유령시는 오프라인까지 옮겨왔다. 몇 해 전 정 시인이 한 대학에 강연을 갔을 때다. 문예창작과 학생이 시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정 시인의 시를 낭독했는데, 그때 학생이 고른 시가 유령시 ‘사랑하다 죽어버려라’였다. 한 수도권 대학신문사는 정 시인을 인터뷰하고선 유령시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전문을 신문에 싣기도 했다.

시를 인터넷에 올릴 때 잘못 옮겨 엉터리시를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오세영 시인은 시 ‘산다는 것은’에서 ‘산다는 것은/가슴에 새 한 마리 기르는 일일지도/모른다’라고 썼다. 하지만 인터넷에선 ‘새’를 ‘개’로 잘못 옮긴 시가 퍼져나갔다. 오 시인의 다른 시 ‘봄’에선 ‘피곤에 지친 청춘이/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란 구절이 있는데 인터넷에선 ‘피곤에 지친 춘향이’로 바뀌기도 했다. 오 시인은 “새와 개가 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자판의 ‘ㅅ’ 옆에 ‘ㄱ’이 있다 보니 생긴 일 같다”며 씁쓸해했다.

한 번 올려진 정보가 무한 복제돼 빠르게 퍼지는 인터넷 특성상 유령시 엉터리시를 바로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해인 수녀의 팬들은 팬카페에 이 수녀가 쓰지 않은 시를 발견할 때마다 제목을 정리해두고 삭제를 요청하고 있다. 이렇게 찾은 유령시들이 30편이 넘는다. 이 수녀는 “아무 말이나 짜깁기해서 내 이름을 적고 있는데, 출처 확인이 안 된 시들은 돌리지 말아야 한다. 정작 제 시들은 책 속에서 울고 있다”고 했다.

한 출판사 문학 편집자는 “시를 무단 복제해서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일은 불법인데, 누리꾼들이 불법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엉터리로 잘못 올리고 있다”며 “시를 올린 누리꾼에게 항의하면 ‘시를 홍보해주는데 왜 그러느냐’며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니 더 큰 문제”라고 했다.

서희원 문학평론가는 “인터넷에 퍼져가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조금씩 변하는 구전의 특성을 가진다”며 “시를 정확하게 읽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인쇄된 원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인터넷#유령시#엉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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