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불황형 흑자와 低물가, 日 ‘잃어버린 20년’ 닮아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3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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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81억4000만 달러로 집계돼 2012년 3월부터 38개월 연속 흑자를 냈다. 한국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고 해외 변수에 민감한 경제 구조에서 경상수지 흑자는 일단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과 마찬가지로 38개월 흑자가 이어졌던 1986년 6월부터 1989년 7월까지의 ‘호황형 흑자’와 달리, 최근의 흑자 행진은 수출과 수입이 함께 줄어들어 생긴 ‘불황형 흑자’여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4월 수출이 작년 같은 달보다 11.2% 줄었는데도 수입 감소율(17.9%)이 더 커서 경상수지가 흑자를 냈다. 우리 경제가 자꾸 위축되고 있다는 의미다.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작년 동월 대비 0.5%로 6개월 연속 0%대에 머물렀다. 일본에서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에 접어들기 직전인 1990년대 초반 나타났던 불황형 흑자, 저(低)물가와 비슷한 흐름이어서 악순환을 낳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실물경제는 위축됐지만 경상수지 흑자가 늘어나 미국 달러화 등 외화 유입이 증가하면서 원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도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원화 가치가 급등해 글로벌 수출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은 추락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아베노믹스’의 간판 정책 격인 엔화 약세를 무기로 빠르게 수출을 늘리는 추세이고, 중국 등은 무섭게 쫓아오고 있다. 반면 한국은 10년째 주력 수출 품목이 그대로일 만큼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올해 들어 5월까지 다섯 달 연속 수출이 감소한 것은 심상치 않은 징조다.

정부는 경상수지 흑자를 줄여 원화 가치의 상승 압력을 낮추기 위해 개인의 해외 증권 투자,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M&A), 연기금의 해외 투자 지원을 담은 해외 투자 활성화 대책을 이달 중 발표할 예정이다. 넘치는 달러의 부작용을 어떤 식으로든 줄일 필요는 있지만 이런 대책만으로 ‘축소 경제’가 불러온 불황형 흑자의 그늘을 없앨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할 수 있게 규제를 과감하게 없애고 투자의 과실이 국민에게 돌아가 내수도 살아나는 ‘확대 경제’의 선순환이 절실하다. 정치권은 규제 혁파와 서비스산업 육성 법안을 국회에서 계속 깔아뭉개고, 정부는 수도권 규제 완화처럼 직접 할 수 있는 정책도 미적거리는 현실에서는 경제의 질적 도약을 기대하기 어렵다.
#불황형 흑자#저물가#잃어버린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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