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보다 훨씬 스케일 큰 ‘4차 엔저’…전문가 “치밀하게 대응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8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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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엔저 쇼크’는 올해 한국경제의 최대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원-엔 환율의 향후 추이에 따라 현재 3%대 초중반에 형성돼 있는 국내외 연구기관들의 성장률 전망치가 2%대로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외환당국은 “시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간헐적으로 내보내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엔저가 워낙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어 기준금리 인하 등 개별적인 정책들의 효과도 극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엔저 정책을 밀어붙이는 일본에 한국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4차 엔저’

현재의 엔화 약세는 오랫동안 큰 규모로 진행된 것만 따졌을 때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경험한 네 번째 엔저 현상이다. 지난 1차(1988~1990년), 2차(1995~1997년), 3차(2004~2007년) 엔저는 수출 감소와 경상수지 적자 확대, 금융권의 외화 부족 사태를 촉발시키면서 실물과 금융 양면으로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문가들은 2013년 일본의 아베노믹스로 시작된 지금의 4차 엔저가 1~3차 때와 비교해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한국에 큰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엔화 대비 원화가치 상승률을 보면 1995~1997년은 약 30%, 2004~2007년은 47%였지만 2012년 6월 초부터 현재까지 2년 11개월 동안은 68%나 됐다.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기간도 길다. 과거의 엔저 국면은 한국에 무역적자 확대와 금융불안 가중이라는 이중고를 안긴 뒤 2, 3년을 고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의 통화 완화 정책이 앞으로도 한참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데다, 수출과 수입이 같이 줄어드는 한국의 ‘불황형 흑자’로 인해 원화 강세 현상도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결국 2013년에 시작된 이번 엔저가 앞으로 최소 2, 3년은 더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일본 중앙은행이 물가상승률 2%를 달성할 때까지 양적 완화를 지속하겠다고 밝힌 만큼 2017년까지는 현재의 통화 완화 정책을 이어나갈 것”이라며 “현 추세대로라면 내년에 원-엔 환율 800원대를 지키는 것도 불안해 보인다”고 말했다.

○수출 감소 폭 점점 확대


정부는 엔저가 한국경제의 위험 요인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국가적인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 경제학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글로벌 자금의 유입이 가파른 원화 강세를 일으키면서 수출이 이미 급감하는 와중에, 미국의 출구전략으로 자본 유출까지 현실화될 경우 경제 펀더멘털이 좋은 한국도 안심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년 동월 대비 수출액은 올해 들어 3월까지 석 달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으며 점점 감소 폭이 커지면서 4월에는 7~8%까지 급감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엔저의 타격을 가장 많이 받는 업종은 자동차다.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업체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펼치며 가격 경쟁에 나서고 있다. 2011년 대지진 여파로 0.9%에 불과했던 도요타의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9%를 넘어섰다. 반면 현대·기아자동차는 수익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합친 올 1분기(1~3월)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4%, 21.5%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당국의 대응책에 따라 원-엔 환율의 하락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조언한다. 박정우 삼성증권 연구원은 “미국 금리인상이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에 자본 유입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원화 강세는 대세적인 흐름이 될 것”이라며 “금리인하나 해외투자 확대 등의 정책 대응을 한다면 엔저는 다소 누그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엔화 약세에 달라진 소비 패턴…일관 관광 늘어▼


엔화 약세(엔저)로 한국과 일본 간 상품·서비스의 상대적인 가격이 달라지면서 소비 패턴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일본 면세점의 제품 가격이 한국보다 10~30%가량 싸졌다. 28일 롯데인터넷면세점에서 이른바 ‘갈색병’으로 불리는 에스티로더의 ‘어드밴스트 나이트리페어 싱크로나이즈드 리커버리 콤플렉스 II(100mL)’ 가격은 19만8536원인 반면 일본 나리타공항 인터넷면세점에서는 같은 제품이 1만6600엔(약 14만9400원)이었다. 한국 면세점 가격이 약 33% 비싼 셈이다. 또 이브생로랑의 ‘루즈 볼립떼’ 립스틱은 한국 면세점에서 3만5607원, 일본 면세점에서 3400엔(약 3만600원)으로 한국 가격이 16% 비쌌다.

한 면세점 관계자는 “원-엔 환율이 900원 밑으로 떨어지면서 일본과 한국 면세점의 가격차이가 더 벌어지고 있다. 이 추세가 장기화하면 중국인 관광객이 일본으로 쏠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엔저로 인해 한국인의 일본 관광은 이미 크게 늘었다. 올해 들어 4월 27일까지 하나투어를 통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 23만3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7.8% 증가했다. 반면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 수는 줄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1~3월에 방한한 일본인은 50만115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60만9061명)과 비교해 17.7% 감소했다.

한국 소비자들의 일본 제품 직접구매(직구)도 늘고 있다. 해외 배송대행업체 몰테일에 따르면 올해 들어 4월 22일까지 일본 배송대행 건수는 58% 증가했다. 엔저 때문에 원화로 환산한 일본 제품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한국인의 구매 수요가 커진 것이다.

유통업계는 다음주 어린이날 장난감 선물도 일본 제품이 대세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오픈마켓 옥션은 최근 한 달(3월 24일~4월 23일) 동안 일본 장난감 ‘파워레인저’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3% 급증했다고 전했다. 인기 직구 상품으로 꼽히는 ‘요괴워치’는 최근 한 달 판매량이 350% 늘어났다. 옥션 관계자는 “엔저 현상으로 일본 장난감 가격이 내려가면서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말했다. 백화점에서도 일본 의류와 상품이 주목받고 있다. 갤러리아백화점 관계자는 “일본 패션 브랜드 ‘주카’는 올 3월부터 가격을 5~10% 인하했다”며 “최근 청담동 주부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한국에 수입되는 일본 자동차는 엔저의 영향으로 다소 벗어나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6840대(렉서스 브랜드 제외)를 판매한 한국토요타의 수입 물량 중 절반가량은 미국에서 수입됐다. 일본에서 전량 생산되는 렉서스 역시 달러 결제를 통해 들여오고 있다. 결제가 미국 달러로 이뤄지기 때문에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국내 판매가격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으로 들어오는 일본차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 본사가 달러를 다시 엔화로 바꾸는 과정에서 엔저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 나온 도요타 ‘프리우스V’ 가격이 이보다 크기가 작은 ‘프리우스’와 거의 비슷한 3880만 원에 정해진 것도 일본 본사에 가격 인하 여력이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의 금융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엔저를 이용한 환테크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엔화 값이 지금처럼 내려갔을 때 대량으로 매수했다가 오를 때 되파는 직접투자다. 하지만 환리스크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데다 환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 엔화로 대출받은 기업들은 엔저로 빚 상환 부담이 줄어들게 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금융회사의 엔화 대출 잔액은 지난달 말 현재 49억3000만 달러(약 5조2790억 원)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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