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버티기의 명수 지의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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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지난겨울 어느 추운 날, 강화도 전등사를 찾았다. 종종걸음으로 올라가 느티나무로 만든 기둥과 지붕을 이고 있는 인물상 등을 구경했다. 부정을 저지른 죄로 평생 무거운 지붕을 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인물상이었다. 무거움을 버티는 품새가 영 힘들어 보였다.

구경하고 내려오는데, 하얗게 질린 길가 바위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큰 여행용 가방만 한 돌덩어리에 꼭 꽃무늬처럼 생긴 회녹색 무늬 두 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크기는 손바닥 정도 됐다. ‘지의류’라는 생물이었다.

지의류는 흔히 이끼와 혼동되는 생물이다. 돌이나 나무, 석조문화재의 표면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그리며 자라는데, 그 모습이 언뜻 이끼와 닮았다. 하지만 이끼와는 분류 자체가 완전히 다른 생물이다. 이끼는 식물에 속하지만 지의류는 미생물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문’이 다른 셈이다. 마치 사람과 나팔꽃 사이처럼.

지의류는 몹시 이상한 생명체다. 일단 이름도 낯설지만 그건 차치하자. 미생물은 미생물인데, 몸이 한 가지 미생물로 돼 있지 않다. 최소 두 가지 이상의 미생물이 뒤섞여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 그것도 ‘가문’이 완전히 다른 두 미생물이다. 사람으로 치면 몸속에 사람 세포 외에 나팔꽃의 세포가 같이 있는 것과 비슷한 식이다.

이렇게 낯설고 이상한데, 의외로 지구 곳곳에 많이 퍼져 산다. 극지 같은 최악의 지역에서도 버젓이 살 정도로 극한 상황에 잘 적응한다. 극지부터 열대, 저지대부터 해발 8000m 이상의 고지대까지, 육지치고 지의류가 살지 않는 곳이 전혀 없을 정도다. 종도 많다. 세계적으로 3만 종 이상이 발견돼 있다.

지의류가 이렇게 지구 전역에서 번성하고 있는 이유는, 두 개의 기막힌 생존 전략 때문이다. 하나는 협력이다. 두 개의 생명체가 결합한 지의류는 두 미생물이 서로 상대를 돕는 방식으로 생존 효율을 높였다. 하나의 미생물이 광합성을 해 양분을 만들고, 다른 미생물은 몸체를 만들어 다른 생명체를 지탱했다. 또 다른 전략은 버티기다. 시절이 수상하면 지의류는 몸속 수분을 최대한 말린 채 그저 견딘다. 유럽우주국(ESA)이 실험해 보니, 우주의 진공과 방사선, 초저온에 1년 반 동안 노출돼 있어도 생존했다.

그 결과, 지의류는 꽤 널리 퍼져 살 수 있었다. 문화재의 표면, 돌, 바위 위에 얼룩덜룩 자라고 있는 생물은 십중팔구 지의류다. 비록 거의 티는 나지 않지만, 지의류는 수억 년 동안 지구 전역에서 살아남은 놀라운 생존자이며 승리자였던 것이다. 지의류는 세상에 여러 종류의 강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생명체다. 다른 생명체를 압도하는 힘과 지략이 유일한 강함이라면, 세상엔 그런 능력을 지닌 생명체가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숨죽이고 버티는 능력, 느린 생장력, 협력하는 능력, 적절히 희생하는 능력, 남을 이기지 않고도 사는 요령 등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 그 지의류가 사라지고 있단다. 국내의 한 지의류 전문가에 따르면,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한국에서는 지의류 보기가 무척 힘들어졌다고 한다. 공해 때문이다. 지의류는 자라는 데 시간이 몹시 많이 든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자라는 데 최대 1000년의 시간이 걸릴 정도다. 전등사가 1600여 년 전에 창건됐다고 하니, 내가 전등사 초입에서 본 지의류는 얼추 전등사의 역사의 3분의 2를 함께한 것이다.

이런 지의류가 사라지고 있다. 혹시 우리가, 스스로가 지닌 강한 능력을 잘못 이해하고 함부로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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