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로버트 파우저]한국에서 동성결혼 합법화를 생각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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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1962년에 토머스 쿤이 쓴 ‘과학혁명의 구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쿤은 과학사의 변화가 ‘패러다임 전환’에 따른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과학자가 오랫동안 한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하고 그 패러다임이 길어지면 점차 활기를 잃게 된다. 그 사이에 사회 및 기술이 계속 변하면서 새로운 발견이나 이론이 나타나 그동안 지속해 온 패러다임이 한순간에 붕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새로운 가치관이 등장하고 기성세대가 자기 가치관을 고집하면서 한순간에 변화가 오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최근에 동성결혼도 그렇다. 자세히 알아보면 20세기 마지막 해인 1999년에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가 한 곳도 없었다. 새천년을 맞이해 2001년에 네덜란드가 합법화했고 이웃인 벨기에는 2003년에 합법화했다. 2005년에 캐나다와 스페인이 이 대열에 가세하면서 합법화 운동이 힘을 얻었다.

2010년대 들어와 동성결혼의 합법화 흐름은 더욱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2009년에 두 주만 합법화한 상태였지만 2015년 4월 현재 미국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38개 주가 합법화했다. 보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에 이르면서 동성결혼 합법화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남미에서도 합법화가 계속되면서 현재 동성결혼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고 멕시코의 몇 개 주에서 합법이다. 그 사이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합법화했고 독일은 논의 중이다.

이 변화 속에 한국의 대응은 늦고 서투르다. 오래 이어졌던 군사독재정권 때 동성애는 서양사회의 ‘퇴폐’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사회적 ‘이단’으로 간주됐다. 1980년대 말 이후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동성연애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은 보수적 태도만 고집해왔다.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독교 단체가 동성결혼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반면에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014년 말 ‘서울시민 인권헌장’ 논란이 이 갈등의 대표적 사례이다.

동성결혼 합법화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면서 한국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가장 핵심적 문제는 인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동성연애자에게도 이성연애자와 동일하게 결혼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게다가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다.

또 다른 문제는 국제적 이미지이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계속 반대하거나 무시하면 한국이 낡은 보수적 국가처럼 보일 수 있다. 이는 2000년대부터 ‘인터넷 대국’, 한류 그리고 케이팝(K-pop) 중심으로 형성된 ‘쿨 코리아(Cool Korea)’ 이미지와는 반대이다. 2015년에 많은 ‘쿨한’ 곳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2020년, 2025년에 이 추세는 더 가속화할 것이다.

1990년대의 ‘세계화’부터 현재의 ‘글로벌화’까지 한국은 독재시대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지 않으면 그동안 좋아진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으로 한국 정부와 언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글로벌 경쟁력’ 지수에 동성결혼 합법화 여부가 영향을 미치게 되면 한국은 부정적으로 보일 것이다. 세계 주요 도시 경쟁력에서도 동성과 같이 결혼할 수 없는 서울이 갈수록 소외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한국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성세대와 종교 및 신도단체 등에서 나온다. 시간이 갈수록 기성세대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며 젊은 세대의 교회 기피 현상 때문에 종교단체도 점차 고령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20대의 동성결혼 지지율이 50%를 넘었으므로 동성결혼 합법화는 이제 시간문제일 것이다.

정치에서 패러다임이 이미 붕괴한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게 개혁하는 것은 훌륭한 지도력이다. 동성결혼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이 틀림없지만 아직 그 상황에 맞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은 한국의 아쉬운 현실이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동성결혼#합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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