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선 악착같이 살면 희망이 생겨… 물도 아껴 먹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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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전 한국땅 밟아 편의점 2곳 사장된 탈북여성

인터뷰 말미, 기자는 김은향(가명·47) 씨에게 “어릴 적 꿈은 뭐였어요? 한국에 와서 그 꿈이 좀 가까워진 것 같나요?”라고 물었다.

“솔직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북한에서는 어린아이에게 ‘꿈이 뭔지’ 묻지 않아요. 그냥 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곳이거든요.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 탈북 북송 재탈북… 우여곡절 끝에 밟은 한국땅

김은향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 김 씨가 처음 탈북한 것은 2000년 9월이었다. ‘중국에 가서 석 달만 일하면 큰돈 벌 수 있다’는 말에 두만강을 건넜다. 8세 아들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지만 큰돈을 만질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다 2003년 11월 결국 북송됐다. 북송되기 전 머물렀던 옌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팬티도 남한 것이라면 좋다’며 한국행을 꿈꿨다. 지금껏 알던 남한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었다. 북송 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4개월 만에 다시 북한을 탈출했다. 아들에게는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김 씨는 중국에 나와 있는 한국 기업의 식당에서 일하며 정보를 얻었다. 몽골 국경을 넘어 14시간 넘게 사막을 걸었다. 2006년 5월 2년여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5개월 후 하나원을 나왔지만 막막했다. 정착금 300만 원이 전부였다. 집앞에는 브로커가 돈을 받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돈은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처음 한 일은 막노동이었다. 겨울 내내 공사판에서 못질을 했다. 의류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텃세를 못 이겨 나왔다. 그나마 안정적 일자리를 얻은 것이 2007년 8월.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편의점 씨유(당시 패밀리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다.

○ 편의점 알바에서 사장까지…다시 재회한 아들

“클렌징 폼 어딨어요? 근데 아줌마 말투가 왜 그래요?”

편의점 일은 막노동보다 몸은 덜 힘들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외래어가 김 씨에게는 외계어였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시와 편견이었다. 매일 밤마다 ‘북한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 건 고욕이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견뎠다. 마실 물 살 돈을 아끼려고 편의점에 있는 끓인 물을 비닐봉지에 담아 집에 가져갔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탔다가 그 봉지를 놓쳐 물바다를 만들었다. 바닥에 흐른 물에는 김 씨의 눈물이 절반이었다.

2년 9개월 동안 편의점에서 일한 김 씨는 편의점을 직접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장사를 해봤던 김 씨는 도전했다. 사장 직함을 달고 일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김 씨는 현재 서울 중랑구 공릉로의 ‘씨유 묵동도깨비점’을 비롯한 점포 2곳을 갖고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들을 데려왔다. 2012년 12월, 스무 살이 된 아들과 6년여 만에 재회했다. 한국에 와서 만난 새 남편과 함께 지금은 새 가족을 꾸렸다.

“어떤 한국 사람들은 ‘살기 너무 힘들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하지만 ‘열심히 살려야 살 수 없는 곳’도 있는데 한국은 훨씬 낫죠. 탈북자들도 죽을 고비를 넘겨 한국에 와놓고 정작 여기에서는 보조금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 버티는 거 보면 안타까워요. ‘꿈꿀 수 있는 자유’를 그토록 원했던 사람들인데 말이죠. 저는 앞으로 더 열심히 꿈꾸며 살 거예요. 남을 돕는 것도 꿈 중 하나죠. 남북한 모두에 작은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김은향#탈북#식당#편의점#씨유#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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