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전시회) 간송문화전 3부 ‘진경산수화’

  • 입력 2015년 4월 20일 11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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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문화전 3부 ‘진경산수화-우리 강산, 우리 그림’전이 작년 12월 14일부터 올해 5월 10일까지 DDP 디자인박물관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진경산수의 완성자로 꼽히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수십 점과 김홍도의 ‘구룡연’ 등 금강산 그림 여러 점 외에 심사정의 ‘만폭동’, 이인문의 ‘총석정’같이 각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 90여점이 망라돼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에디터 곽은영 자료제공 간송미술문화재단


우리나라의 대표적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꼽히는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은 문화재야말로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라고 확신하고, 민족문화재를 수호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진경산수화 또한 그러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 안에 있는 ‘진짜 경치’를 사생해 낸 그림이다. 진경산수화의 서막은 29세에 반정에 참여했던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에 의해서였다. 그는 반정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시화로 이를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해 진경산수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진경산수화의 도도한 흐름

이후 이 전통을 이어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고 완성한 인물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었다. 겸재는 <주역(周易)>에 밝은 사대부 화가로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원리를 진경산수화법에 끌어들여 그림을 구성했다.

그는 중국 남방화법의 기본인 묵법(墨法)으로 음(陰)인 흙산을 표현하고, 북방화법의 기본인 필법(筆法)으로 양(陽)인 바위산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의 영향 아래 계승되고 꽃핀 진경산수의 도도한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진경산수화전에는 겸재의 59세 경 작품인 ‘성류굴(聖留窟)’부터 84세 경 그렸다고 추측되는 ‘금강대(金剛臺)’, 우리나라의 명승지로 꼽히는 관동팔경과 단양팔경, 경교명승(京郊名勝, 서울 근교의 이름난 경치), 박연폭포 등이 화폭에 담겨 출품됐다. 연대별로 유의해 관람하면 겸재 진경산수화법의 변화과정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청풍계(淸風溪)
정선(鄭敾, 1676~1759), 견본담채, 133.0×58.8cm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병자호란(1636)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별장으로 꾸몄다. 겸재가 64세 되던 해인 1739년에 그렸다.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인왕산 특유의 잘생긴 백색암벽(白色岩壁)들이 정선 특유의 대담하고 장쾌한 묵법에 의해 검은 바위로 표현되어 있다. 나무의 표현도 둥치를 거친 붓으로 속도감 있게 처리함으로써 일체의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제했는데, 우람하고 장대한 기품이 우리 주변에서 보는 소나무의 특징을 너무도 잘 전해 준다. 대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 재현한 것으로 정선이 육십 평생을 사생으로 일관하면서 터득해낸 진경의 묘리다.

광진(廣津)
정선(鄭敾, 1676~1759), 견본채색, 20.0×31.5cm

현재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차산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광나루의 맑고 아름다운 풍광을 드러내는데 중심을 둬 강산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에 별서가 운치 있게 경영된 사실만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아차산의 층진 산 모습을 대담하게 구사해 실제 경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강변의 토파(土坡)는 소부벽(小斧劈)으로 처리하고 백사장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강물은 푸른 물빛으로 엷게 칠했고 강상(江上)에는 돛단배들을 아래위로 띄워 놓았다. 현재 수많은 차와 지하철이 지나다니며 교통의 홍수를 이루는 모습과 비교하면 참으로 한적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정선(鄭敾, 1676~1759), 지본담채, 21.2×56.3cm

퇴계 이황의 유적 도산서원을 그린 작품이다. 정선은 도산서원을 한 폭의 선면(扇面, 부채의 거죽)에 빠짐없이 묘사하고 있는데, 신록이 싱그러운 초여름인 듯 산과 들이 연두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다. 원생들은 모두 학업에 몰두하는 듯 내외에 인기척이 없고 오직 수복(守僕) 하나만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학교의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금강내산(金剛內山)
정선(鄭敾, 1676~1759), 지본수묵, 28.2×80.5cm

내금강의 전경을 오로지 수묵을 통해 접는 부채의 선면 위에 올려놓은 정선의 작품이다. 부채라는 특정한 공간 안에 장안사(長安寺) 동구(洞口)로부터 정양사(正陽寺)에 이르는 토산연맥(土山連脈)을 하단에 늘어 깔면서 그 위로 암봉들을 가득 채우는 화면구성법을 쓰고 있다. 화면의 위치 경영도 능숙하고 필법도 무르익었다. 미법(米法)을 변형시킨 정선 고유의 운산법(雲山法)을 썼다. 정선의 나이 70대 중반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옥류동(玉流洞)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지본담채, 34.0×58.5cm

영조대의 대표적 문인화가인 능호관(凌壺觀) 이인상이 28세 되던 1737년(영조 13년)에 금강산을 여행한 뒤 외금강의 절경으로 일컫는 옥류동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후기에는 진경산수화가 대대적으로 유행하며 많이 그려졌는데, 이 그림은 특히 고요하고 깨끗하며 소박한 문인화의 경지로 승화된 걸작의 진경산수화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화면 전체에 수정처럼 맑은 기운과 기상이 감돌아 품격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채화 같은 근대적 감각까지 풍기며 독특한 화경을 이루어 냈다.

총석정(叢石亭)
이인문(李寅文, 1745~1821), 지본담채, 28.2×34.0cm

통천에서 동해변을 따라 동북쪽으로 7km쯤 올라가면 총석정이 있다. 총석정은 육모의 기이한 돌기둥과 동해의 장활한 바다와 어우러져 관동팔경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이인문은 정선과 심사정의 화법을 계승해 조화시킨 화가로 평가받는데, ‘총석정’에도 그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그러나 고도로 계산된 구도와 경물의 배치를 통해 공간감을 조성하고 주제를 뚜렷이 부각시킨 화면 구성은 이인문 특유의 장점이다.

한편, 탁월한 기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헌걸찬 기세도, 단원의 시정 넘치는 정취도 미흡해 그림이 다소 무미하게 느껴진다. 이인문의 진경산수화가 지니는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연대별로 변해가는 진경산수화

겸재의 진경산수화법 창안은 획기적인 문화 혁명이었고, 다음세대인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능호관(凌壺館)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 1714~1759) 등 사대부화가가 겸재의 영향을 받았다.

진경시대 말기에 이르면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고송유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1745~1824),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초원(蕉園) 김석신(金碩臣, 1758~?) 등의 화원화가들이 배출돼 겸재의 진경정신을 계승하면서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한다.

특히 김홍도는 정조의 왕명을 받들고 강원도 영동 9군의 명승을 사생해 돌아오는데, 세련된 필법으로 섬세하고 충실하게 풍경을 묘사해 겸재와는 또 다른 흥취를 자아낸다. 이들의 작품 역시 이번 전시회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이후 진경문화가 부정당하기 시작하는 북학시대에 진경산수화가 어떻게 잔영을 끌어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도 함께 출품돼 있는데,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 1764~?), 이호(梨湖) 김기서(金箕書, 1766~1822), 임전(琳田) 조정규(趙廷奎, 1791~?),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 등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진경정신을 상실한 진경산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국망기에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비교 감상하면 진경문화의 실체와 그 시대 진경산수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고유 이념을 갖는다는 것이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는데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구룡연(九龍淵)
김홍도(金弘道, 1745~?), 견본담채, 91.4×41.0cm

구룡연은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여덟 곳의 못, 즉 팔담(八潭)을 이루며 120여 미터의 절벽 아래로 쏟아지며 만들어진 거대한 연못이다. 내외금강을 통틀어 가장 크고 웅장한 폭포이자 연못으로, 구룡연을 보지 못하고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단의 낮은 봉우리도 험준한 절벽인 듯 선비 두 사람이 겨우겨우 사다리를 타고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
안중식(安中植, 1861~1919), 1912년, 지본담채, 23.4×35.4cm

1912년 정월 초하루 밤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탑원(塔園)에 모여 ‘도소(屠蘇)’라는 술을 마시며 일 년의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장수를 기원하던 문인 묵객(墨客)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기록성과 기념성이 강해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이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답게 심전(心田) 안중식이 뛰어난 조형력을 발휘하며 멋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이 그림은 현재까지 알려진 안중식의 가장 이른 실경산수화라 더욱 주목되는데, 일견 수채화에 가까운 필치와 현대적인 풍경화 같은 느낌이 색다른 분위기를 낸다.




기사제공 = 엠미디어(M MEDIA) 라메드 편집부(www.remede.net ), 취재 곽은영 기자(kss@egi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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