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튀는 재주, 계급과 만나야만 빛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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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인들/허경진 지음/400쪽·1만8000원·RHK

타인의 글을 통해 전달받은 누군가의 재주에 대한 평가는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추사 김정희가 궁금하면 이런저런 설명 치우고 남아 있는 글씨를 보고 알아서 판단하면 그만이다. 연암 박지원이 ‘천재 실학자’였다는 평판을 습득하기에 앞서 ‘열하일기’를 훑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능력에 대한 기록에는 능력 외에 많은 요소가 개입한다. 그중 한 가지가 ‘계급’이다.

중인 화가 조희룡의 솜씨에 대한 스승 김정희의 평가는 이랬다.

“난 치는 법은 예서(隸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화법(畵法)대로만 하려면 한 획도 긋지 않는 게 좋다. 조희룡은 내 난 치는 솜씨를 그대로 배워 화법 한 가지만 쓰는 폐단을 면하지 못했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용 공부를 쌓지 않은 하층계급의 그림은 그림도 아니라는, 잔인하고 오만한 단언이다. 박지원은 일본 문인들의 열광적 찬사를 얻고 돌아온 젊은 역관 이언진의 시에 대해 “자질구레하고 보잘것없다”고 퉁을 놓았다. 분개한 이언진은 원고를 불태운 뒤 병들어 죽었다.

중인들 역시 그 아래 계급의 튀는 재주에 대해 냉담했다. 정조 때의 농사꾼 수학천재 김영은 정확한 해시계를 만들어 어명으로 관상감에 특채됐으나 왕이 죽자 곧 벼슬에서 쫓겨났다. 7년 뒤 나타난 혜성의 운행 도수를 아무도 계산하지 못하자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일을 마친 뒤 바로 쫓겨났다. 남의 집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다 굶어죽은 그의 원고 상자를 관상감 생도가 훔쳐갔다고 전해진다.

초반부가 심심하다. 100쪽을 넘긴 뒤부터 각 인물의 사연에 생기가 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습과 별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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