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32년 만에 ‘잊혀질 권리’ 찾은 유지훤 코치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4월 17일 05시 45분


두산 유지훤 수석코치는 32년 만에 ‘잊혀질 권리’를 찾았다. OB 시절이던 1983년 작성한 47연타석 무안타 기록은 올해 NC 손시헌이 48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하면서 비로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게 됐다. 스포츠동아DB
두산 유지훤 수석코치는 32년 만에 ‘잊혀질 권리’를 찾았다. OB 시절이던 1983년 작성한 47연타석 무안타 기록은 올해 NC 손시헌이 48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하면서 비로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게 됐다. 스포츠동아DB
“어이∼, 이 기자! 나 좀 봐∼.”

2009년 6월 어느 날 오후.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경기 전 대전구장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한화 유지훤 수석코치(현 두산 수석코치)였다. 1루 덕아웃에서 맞은 편 3루 덕아웃 앞까지 한걸음에 달려오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꼭 기사 뒤에 그렇게 한 줄 붙여야 돼?”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하늘만큼이나 잔뜩 흐린 표정. 기자의 표정도 ‘반가움’에서 ‘어리둥절’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어진 하소연.

“며칠 전 당신이 쓴 기사 있잖아. 진갑용(삼성)이 43타석 만에 안타를 쳤다는 기사 말이야. 거기에 꼭 내 얘기를 넣어야 했냐고. 그걸 안 넣고 기사 써도 되잖아∼.”

그제야 무슨 뜻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진갑용이 그해 6월 16일 대구 롯데전 4번째 타석에서 안타를 치면서 42연타석 무안타 행진을 마감했다는 기사. 거기에다 친절(?)하게도 ‘이 부문 역대 최고 기록은 OB 유지훤이 1983년 7월 12일 대구 삼성전(첫 타석)부터 8월 6일 구덕 롯데전(첫 타석)까지 작성한 47연타석 무안타’라고 설명해놓은 부분이 아프고 쓰렸던 모양이다.

“오래전 일이고, 굳이 나쁘게 해석할 기록도 아니잖아요. 또 역대 최고기록쯤은 독자에게 설명을 해야 기사가 완성되는 거라서….”

그는 자신을 달래는 기자의 말을 가로막으며 다시 하소연을 이어갔다.

“나야 상관없지. 야구를 하다보면 이런 기록 저런 기록도 생기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 막둥이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인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기사를 보고 놀린 모양이야. 물론 선생님도 농담으로 말했겠지만, 애가 요즘 집에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으니 기분이 좀 그렇더라고. 앞으로 어떤 선수가 연타석 무안타 기록을 이어갈 때 날 거론 좀 안할 수 없어? 잊혀질 만하면 내 이름이 나오니, 원.”

요즘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한창이다. 무심코 올린 사진 한 장,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인터넷에 기록되고 기억되는 세상. 원하지 않는 자신의 정보와 기록을 인터넷에서 지워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잊혀질 권리’는 그래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야구선수는 원하지 않는 자신의 기록을 지워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야구 기록에서 ‘잊혀질 권리’는 결국 누군가가 기록을 깨는 순간에서야 획득되는 권리다.

그런데 32년간 감금됐던 유 코치의 ‘잊혀질 권리’는 올 시즌 봄바람처럼 살랑 찾아왔다. NC 유격수 손시헌이 지난해 10월 6일 잠실 LG전부터 이달 11일 마산 SK전 두 번째 타석까지 48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32년간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던 그의 기록. 이제야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됐다.

유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6년 전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이제 군대에 갔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손시헌이 기록을 깼네요”라는 인사에 그는 허허롭게 웃었다. “손시헌이 48연타석 무안타 기록을 세우는 동안 팀에서 빼지 못했잖아. 웬만한 선수라면 벌써 2군 갔겠지. 그만큼 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선수야. 그래서 그런 기록도 세우는 거라고. 나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앤서니 영은 뉴욕 메츠 시절이던 1992년 5월 7일부터 1993년 7월 25일까지 27연패를 당해 메이저리그 최다연패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자신의 기록에 근접하는 투수가 나올 때마다 원정경기까지 따라다니며 승리를 기원했다. 자신의 기록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했다. 야구에서 기록은,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그것대로 가치를 지니는 땀의 흔적이다. 때론 잊혀지고 싶겠지만, 지나고 보면 잊혀진다는 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