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한미관계와 인지부조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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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인지부조화라는 심리학 이론이 있다. 1957년 미국 심리학자인 리언 페스팅어가 만든 것으로 내 생각과 바깥 현상이 다를 경우 처음에는 괴로워하고, 결국에는 생각을 바깥 현상에 끼워 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전인수, 자기 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이달 말 워싱턴을 방문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일 정상회담(28일)과 상·하원 의회 합동연설(29일)을 앞두고 기자는 대미 관계를 다루는 한국 외교 곳곳에서 이런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있다. 미국은 영원히 한국 편인 줄 알았는데 아베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워싱턴 내 친일 기류가 심상치 않게 형성되고 있는 게 현실. 그러자 속으로는 괴로워하면서도 “한미 관계는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 다만 아베 총리가 2013년 방미 때 의회 연설을 못했기 때문에 기회를 한 번 준 것”이라는 해석과 접근법이 자주 포착된다.

아주 틀린 말들은 아니다. 하지만 워싱턴 내 대일(對日) 기류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 것의 본질은 “이번은 아베 차례”라는 발상과는 거리가 있다.

최근 워싱턴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아베 총리는 2013년 2월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별 의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푸대접을 받자 절치부심했다고 한다. 한 외교 소식통은 “아베 총리는 어떻게 보면 얄밉다 싶을 정도로 각종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다걸기(올인)’했다. 지난해 에볼라 사태, ‘이슬람국가(IS)’ 격퇴 등 미국 주도의 글로벌 이슈에 가장 열심히 참여한 나라가 일본”이라고 잘라 말했다. 외교도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가뜩이나 욱일승천하는 중국을 견제하느라 바쁜 미국 입장에선 일본이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없다.

반면 그동안 한미관계는 어떤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5월 방미해 상·하원 합동연설이라는 ‘융숭한’ 대접을 받은 배경에는 전임 이명박 정권에서 복원된 한미관계를 계속 이어가자는 미국의 기대가 깔려 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에선 한국이 오히려 중국과 가까워지려 한다는 시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한중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최근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결정으로 정점을 찍는 분위기다. 정작 한미 간 주요 현안 중 하나인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 이슈는 중국 눈치를 보느라 별 진전이 없다. 자신의 명함 뒷면에 중국어 이름을 새기고 다니는 동아시아 분야 석학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얼마 전 기자에게 “박 대통령은 왜 그렇게 중국에 경도되느냐. 내 주변에서 다 궁금해한다”고 묻기도 했다.

한마디로 대미(對美)관계의 인지부조화이다. 여기의 바탕에는 우리가 미국 동북아 전략의 본질을 간과한 측면도 있다.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주로 한미관계라는 양자의 틀에서 보지만, 워싱턴에서 지켜본 미국은 동아시아 문제를 한미일 3각 동맹의 틀 안에서 본다. 한미 간의 프레임이 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미 의회 연설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말로만 주장해봤자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을 움직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미국의 속내와 동아시아 전략을 객관화해서 제대로 읽고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외교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워싱턴에서 “한국은 미국에 가장 중요한 동맹 중 하나”라는 말이 여전히 들린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의 방미가 예상되는 6월까지 약 80일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한미관계#인지부조화#아베 신조#중국#AIIB#THA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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