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치매 걸린 아버지, 그의 인품이 한방울씩 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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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중인 나의 왕/아르노 가이거 지음/김인순 옮김/224쪽·1만3000원·문학동네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

“아우구스트 가이거(아버지)의 위트와 지혜. 아버지에게서 말이 더디게 나오고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탄스러운 문장들이 점점 드물어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 모든 게 사라져간다는 것이. 마치 피를 흘리는 아버지를 슬로모션으로 지켜보는 느낌이다. 삶이 아버지에게서 한 방울 한 방울 새어나가고 있다. 아버지의 인품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한 방울 한 방울 새어나가고 있다.”(15쪽)

저자는 치매로 고통받는 아버지와 함께한 10년간의 자전적 기록을 소설로 썼다. 그는 일본 목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말인 “지극히 보편적인 것도 개인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로 소설을 시작한다. 제목 ‘유배중인 나의 왕’은 그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아버지는 평생 살아온 집을 낯설어하더니 늘 ‘집에 가자’며 유배당한 늙은 왕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였다.

쾌활하고 잘 웃고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뒤에도 추운 날씨 탓에 차가워진 아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너희는 너희 할 일을 하렴. 그동안 나는 이 손을 녹여주마”라고 말한다. 하지만 따뜻한 순간은 짧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선 자동차가 어떻게 저 안에 들어갔느냐며 놀라고 뉴스 앵커 입에 비스킷을 대고 계속 먹으라고 권한다.

그는 이런 아버지를 보며, 치매 환자를 어린이 같다고 비유하는 세상을 향해 “정말이지 화가 치미는 일이다. 아이는 능력을 얻고, 치매 환자는 능력을 잃는다”고 일갈한다.

고통스러운 체험 속에서 저자만의 철학을 찾았기에 읽어볼 만하다. 저자의 다음 문장엔 밑줄을 치고 여러 번 읽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더는 줄 게 없어도, 적어도 늙고 아픈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줄 수 있다. 좋은 쪽으로 가정하면, 이것도 아버지로서의 일이고 자식으로서의 일일 수 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유배중인 나의 왕#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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