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평양의 개팔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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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평양에서 애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보안원이 “이봐 동무, 혁명의 수도에서 개를 데리고 한가롭게 다니다니” 하며 호통을 치진 않을까. 지나가는 뭇 시선이 부럽게 쳐다보진 않을까.

답은 “아무 일도 없다”이다. 남쪽의 상상과는 사뭇 다르게, 애견 문화는 서울과 평양이 별 차이가 없다. 단, 평양에선 애견의 배설물은 그냥 방치한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평양에서 애견을 키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시 북한이 주민에게 자주 보여준 사상교육 영상물엔 서방의 애견이 단골로 출연했다. 마사지를 받는 애견과 거리의 노숙인 모습을 교차해 보여주며 “썩고 병든 자본주의에선 사람이 개보다 못하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1990년대 평양에 살면서 나는 젊은 여성이 안고 나온 애견을 딱 한 번 보았다. 그때 처음 들었던 생각이 “누구 딸일까”였다. 당시 애견은 무소불위 권력의 상징이었다. 보안원도 모르는 척했다. 단속해야 본전도 찾지 못할 고위층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재벌 2세의 수억 원대 고급 스포츠카처럼 평양의 애견이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자 몰래 키우는 부유층도 늘었다. 급기야 1990년대 말 평양에선 애견 단속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고, 김정일에게 보고가 되기도 했다. 남쪽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김정일도 애견을 끼고 산 역사가 깊다. 단속 논쟁은 “애견 키우는 게 뭐가 문제냐”는 김정일의 판결로 막을 내렸다.

평양의 애견 문화가 중산층까지 파고든 계기는 특이하게도 서울에서 ‘세콤’과 같은 보안경비업체가 확장한 것과 똑같은 이유였다. 2001년 평양 중심부 중구역의 한 가정집에 칼을 든 강도가 들었다. 이때 몸집이 크지도 않은 애견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안주인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 소문이 평양에 바람처럼 퍼지자 “점점 치안이 불안해지는데 개에게라도 집을 맡기자”며 너도나도 애견을 키우기 시작했다. 셰퍼드와 같은 군견을 키우는 집도 늘었다.

2000년대 초반 평양의 애견 붐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을 연상케 했다. 평양에선 몰티즈와 시추가 가장 인기가 있는데 당시 좋은 품종의 암컷은 500달러를 호가했다. 교배 한 번에 100달러, 새끼 한 마리에 100달러였다. 당시 100달러는 북한의 일반 가정이 1년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애견이 있어야 좀 사는 집 취급을 받다 보니 토종견을 염색해 애견으로 둔갑시켜 파는 사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이런 붐을 타고 중국에서 수많은 애견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밀수돼 들어왔다. 당시엔 북한 농촌 집에서 자란 토종견들도 식용으로 중국에 몰래 팔렸다. 중국에서 팔려온 개의 몸값은 수백 달러, 북에서 팔려간 개의 몸값은 10달러 남짓이었다.

애견은 중성화 수술이 없는 평양에서 마음껏 새끼를 낳았다. 그러니 해가 다르게 가격도 떨어져 지금은 아무리 비싸도 100달러를 넘기 힘들다. 이제 애견은 더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 아니다.

유행에 편승해 애견을 키우기 시작했던 사람들 중에서 아파트에서 기르기가 힘들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지인에게 잡아먹으라고 주는 사람도 생겨났다. 2000년대 중반 애견이 닭이나 토끼보다 폐사율이 낮다며 식용으로 수십 마리씩 길러 파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애견이 토종견보다 육질이 좋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광복거리와 통일거리엔 애견 고기 전문식당도 생겼다.

이 사실이 2008년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다. 김정일은 “애견을 잡아먹는 행위는 미개한 인종에게서나 있을 수 있는 야만행위”라고 격노했다 한다. 그 직후 당국은 애견 통제령을 내렸다. 지금까지 이런 통제령이 두세 번 더 내려졌다. 하지만 무조건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될수록 기르지 말라는 식의 권고였다. 다만 셰퍼드 같은 큰 개는 사람을 물 수 있어 무조건 금지시켰다.

항상 그랬듯이, 통제령의 약발도 몇 달밖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애견 바람은 쉽게 죽었다. 주변에서 쳐다봐 주지도 않고, 살림에 부담만 되니 사람들도 점점 권태를 느끼던 때였기 때문이다. 물론 평양의 애견 붐이 전혀 헛되진 않았다. 개를 식용동물로만 여겼던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정이 통하는 동반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지금 평양의 견주는 밥술깨나 뜨고, 애견이 정말로 좋은 사람만 남았다. 이들은 동물병원도, 전용사료도 없는 그곳에서 애견과 한솥밥을 나눠 먹고, 장마당에서 옷을 주문해 입히며 살고 있다. 한편으론 여전히 평양의 곳곳엔 왁자지껄 오가는 술잔 속에 개고기를 뜯는 식당도 많다. 서울처럼.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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