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은 동아일보 창간호서 ‘知아, 否아’ 외친 항일 언론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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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교수 ‘2015년의 민족 언론인’ 양기탁 선생 평전 펴내

7일 서울 서초구 반포로 연구실에서 양기탁 평전 발간 소감을 말하고 있는 정진석 교수.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7일 서울 서초구 반포로 연구실에서 양기탁 평전 발간 소감을 말하고 있는 정진석 교수.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양기탁(1871∼1938)은 한말 언론인 가운데 일본어 영어 한문까지 능통했던 당시로선 드문 국제화된 인재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최대의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운동에 진력해 ‘민족 언론인’이란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인물입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76)가 최근 ‘항일민족 언론인 양기탁’(기파랑)을 펴냈다. 서재필기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양기탁을 ‘올해의 민족 언론인’으로 선정하고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얼굴 부조 동판 헌정식을 여는 것을 계기로 책을 낸 것. 340쪽 분량에 주석이 촘촘히 달린 역작이다. 정 교수를 7일 서울 반포로의 개인연구실에서 만났다.

“기념회에서 책을 의뢰받은 게 6개월 전이어서 무척 촉박했습니다. 양기탁과 같이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한 영국인 사주 배설(Bethell·1872∼1909)에 대한 선행 연구가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어요. 배설 연구 당시 확보했던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자료, 일본 외교문서 등에서 양기탁 관련 내용을 빨리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013년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동포를 구하라’ 등 배설과 관련된 책을 3권 펴냈다.

배설과 양기탁은 1904년 7월 한글판 국한문판 영문판 등 3개 언어로 내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영국인 배설의 소유인 신문사가 치외법권 지역인 것을 이용해 두 사람은 항일 논조를 줄기차게 펴 나갔다. 박은식 신채호 같은 당대 논객이 신보사에서 일본 침략을 규탄하는 필봉을 휘둘렀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어로 번역한 호외를 발행해 세계에 알려지도록 했다.

“당시 일본 통감부는 신보의 기사가 ‘의병 봉기를 선동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배설이 신보와 양기탁의 항일 언론을 지켜준 울타리였고 양기탁은 신보를 떠받치는 대들보였습니다.”

한국 병합을 준비하던 일제에는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양기탁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제는 양기탁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워 기소했으나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배설이 1909년 갑자기 숨진 뒤 일제는 후임자에게 거액을 주고 신문사를 사들여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재발간한다.

정 교수는 “한말 언론인 가운데 형무소에 가장 빈번하게 투옥된 인물이 바로 양기탁”이라며 “대한매일신보가 없어진 뒤 1911년 신민회 사건을 비롯해 1918년, 1920년에 반복적으로 구금당했다”고 말했다.

양기탁은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감독을 맡기도 했다.

정 교수는 “당시 그는 실무자는 아니었고 그의 항일 언론 정신을 잇겠다는 뜻으로 동아일보가 모신 것”이라며 “창간호 1면에 ‘知아 否아’(지아 부아·아느냐 모르느냐)라는 제목으로 그의 이름이 달린 논설이 실려 있다”고 말했다.

양기탁은 1922년 이후 중국 만주로 탈출한 뒤 임시정부 국무령 등으로 추대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1938년 중국에서 숨졌다. 정 교수는 “이 책은 ‘언론인 양기탁’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만주로 간 이후의 독립운동은 간략히 기술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앞으로 3권짜리 ‘한국언론통사’를 기획하고 있다. 그는 “한말,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등 세 시기로 구분해 언론의 역사를 두루 아우를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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