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내가 갈까, 중동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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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장
박중현 경제부장
“덥고, 술도 잘 못 먹고 해서 답답하고 심심하긴 하다더라. 그래도 에어컨 쌩쌩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한국인 식당에서 밥을 대줘서 지내는 데 문제는 없대. 한 5년 자리 보장해 주고 돈 좀 더 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지….”

최근 어릴 적 친구들끼리 모이자는 연락을 받고도 가지 못했다. 서울 은평구에서 초중고교를 함께 다닌 동네 친구들로 올해 50줄에 들어섰다. 7명의 성(姓)이 모두 다르고 어릴 때 고스톱을 자주 쳐 모임 이름은 ‘칠각패’. 건설업체에 다니는 한 명이 작년에 자원해서 베트남 현장에 나가는 바람에 그 친구가 한국에 휴가 오는 6개월에 한 번꼴로 연락이 온다.

대기업 계열 정보기술(IT) 업체에서 현장 팀장으로 일하는 친구에게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화했다가 중동 얘기가 나왔다. 자기 회사에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등에 현장이 있다며 그 친구는 “기회만 되면 노후나 애들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중동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난달 중동 순방을 다녀온 박근혜 대통령이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며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중동 진출을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할 정도로 해보라)”라고 한 말이 청년들 화를 돋웠다. ‘니가 가라, 중동’이란 비아냥거림은 유행어가 됐다.

청년들은 대통령의 말에서 모래를 씹으며 사막에서 등짐 지는 자기 모습을 떠올린 모양이다. 하지만 1970년대 한국 건설근로자들이 중동에서 하던 거친 일은 이제 동남아 근로자들의 몫이다. 한국 건설업체 임직원들은 국내보다 1.5배의 보수를 받으며 예전에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맡던 전문, 관리업무를 한다. 비자 문제, 중동의 높은 청년실업률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자리가 얼마나 날지는 미지수다. 다만 대통령이 거론한 IT, 의료서비스, 원전기술 등의 분야에 일자리만 있다면 보수 등이 괜찮을 공산이 크다. 이미 많은 한국 스튜어디스들이 중동 지역 항공사에 취업해 있다.

회의에 참석했던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이 말한 맥락도 알려진 것과 조금 다르다. 그 관계자는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를 만들고, 여러 부처에 흩어진 해외취업 지원 업무를 ‘K-무브’ 브랜드로 통합해 채근했는데도 실적이 저조해 관련 부처를 질책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해외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줄 서 있지만 정부 지원 해외 인턴십 참가자들의 실제 취업률은 10%가 채 안 된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명문대 출신들의 국내 대기업 취업용 ‘스펙 쌓기’에 주로 쓰인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게다가 대통령 개그의 썰렁함은 더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그토록 화가 났을까. “대한민국은 노인들의 나라다. 젊은 것들은 나라를 떠나라” “청년들 지지율 안 나오니까 중동으로 보내버리려나 봐요”라는 청년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취업하기 힘든 현실을 기성세대와 현 정부의 책임으로 생각하던 차에 하와이도 아니고 중동에 가라니 짜증이 확 치민 것이다.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성장전략도 없이 정년부터 연장해 놓은 국회,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데 꼭 필요한 노동구조 개혁 논의의 지지부진함 등이 무책임한 기성세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답답한 청년들의 심정을 고려한다면 대통령이 차라리 이렇게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중동에 급여가 괜찮은 전문직 일자리가 좀 생길 것 같습니다. 부모 세대가 한 번 더 고생합시다. 자녀들을 위해 중동에 나갑시다. 대신 국내에서 비는 일자리는 한 번도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청년들에게 내줍시다.”

그랬다면 다수의 양심적 기성세대들은 이렇게 화답했을 것 같다. “그래 내가 갈게, 중동.”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중동#일자리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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