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내가 대학생 때부터 본 김기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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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난 대학 시절 신촌 우리마당에 태평소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칼로 찌른 김기종 씨가 운영자로 있었다. 태평소 강습이 끝난 뒤 종종 뒤풀이 자리가 있었고, 김 씨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지만 자주 동석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단소 하나 제대로 불지 못하는 실기맹(盲)이었다. 그렇다고 뛰어난 이론가도 아니었다. 말은 감정이 앞서 산만했으며 논리라는 것도 맹목적 ‘우리 것’ 주의에 가까웠다. 그가 남다른 점은 열정이었다. 다만 온갖 우리 것에 대한 관심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여놓고는 수습은 잘하지 못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기자가 되고 나서다. 예전 친분으로 문화 행사 관련 보도를 간혹 요청받았다. 그중에서 그가 재현을 위해 뛰어다니던 애오개본산대놀이가 기억난다. 그런 사이 우리마당은 문을 닫았다. 아마도 운영난이었을 것이다. 그는 본래 운영 같은 것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는 정말 오랜만인 지난해 그가 신문사로 연락을 해왔다. 개량한복은 예전과 같았으나 수염을 기르고 헌팅캡을 쓴 게 달라졌다. 처음엔 눈치를 못 챘으나 손에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심한 화상이 있는 걸 보고는 놀랐다. 분신을 시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옷으로 가린 곳의 상태는 어떠한지 물어보지 못했다.

그는 2007년 노무현 정권 말기에 청와대 앞에서 분신을 시도했다. 우리마당은 1980년대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운동의 모임 장소로도 종종 이용됐다. 우리마당은 1988년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습격당한 적이 있다. 그는 ‘노무현의 민주 정권’이 진상을 밝히지 못하면 영원히 묻히고 만다면서 분신으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다행히 경찰의 제지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지난해 네이버 카페에 ‘우리마당 30주년 소식’이란 글을 올렸다. “우리마당에서의 제 노력에 대해 일반 사회에 존재하는 표창, 아니 감사장 하나 마련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오히려 따돌림 당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자랑하듯이 옛일들을 떠들어보면 왜 옛날얘기를 하느냐고, 오히려 핀잔을 받는 것이 제가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의 좌절감이 느껴진다. 울분도 깔려 있다. 다른 글에서는 우리마당을 거쳐 가 진보 정권에서 총리 장관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눈에 띈다. 자신에게 보상은커녕 표창 하나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마당은 1988년 피습 사건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운영됐고, 더 이상 열정으로 끌어가는 게 한계에 이르렀을 때야 문을 닫았다.

지난해 그와 헤어진 후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로부터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받았다.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외세 배격 자주통일론은 맹목적 ‘우리 것’ 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과거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집에서 친북 서적이 나올 수 있고 그의 발언 중에 친북 발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배후세력이 있다면 그 배후세력은 가장 부적합한 사람을 실행자로 택한 것이다. 리퍼트 대사 사건은 배후세력을 포함해서 모든 가능성을 조사해야 한다. 다만 아무리 엄중한 사건이라도 틀을 미리 정해놓고 꿰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집에서 쓰던 과도를 들고 돌진한 것에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혁명가의 주도면밀한 실행보다는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주인공의 정신적 광기가 느껴졌다. 사실 현대의 많은 암살 혹은 암살 기도 사건이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서 비롯됐다. 이런 경우도 이념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 이념은 광기를 표출하는 통로가 될 뿐이다. 공안적 사고방식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올바른 대책도 나올 수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김기종#리퍼트 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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