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하소연 좀 들어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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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이영민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그의 얼굴을 처음 본 건 과거 워크숍 사진에서였다. 주름이 깊게 팬 중년의 빅이슈 판매원들 속에서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잠깐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다른 일자리를 얻어 떠난 사람”이라고 했다.

지난해 가을 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젊었다. 왜소하긴 했지만, 건강상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처음 본 내게 “이번 신간은 반응이 좋아서 어제는 15권을 팔았다”고 말할 만큼 붙임성도 좋았다.

며칠 뒤 취재를 다녀오다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20대의 사지가 멀쩡한 청년이 판매원이 된 사연을 듣게 됐다.

그는 두 살 무렵 사고로 부모를 잃었단다. 조부 밑에서 야구선수를 꿈꾸며 커왔지만 고등학교 때 부상을 당해 꿈을 접었다. 꿈을 잃자 방황이 시작됐다. 말썽을 피웠고 퇴학을 당했다. 그 무렵 조부가 하나뿐인 손자의 방황에 애를 끓이다 세상을 떠났다.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중 실수를 저질렀다.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며 반성했다. 빅이슈 판매원은 다시는 실수하지 말자는 그의 다짐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 종종 안부전화를 걸게 됐다.

그런데 얼마 전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사무실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집이 없어서 임시로 머물던 곳에도 없었다. “예전에 다친 어깨와 발목을 종교단체의 지원으로 수술 받게 됐다”며 “수술까지 남은 한 달간 한 권이라도 더 팔면서 저축을 하겠다”던 그였다. ‘의지가 약해졌나? 갈 거면 얘기라도 하고 가지.’ 원망을 거듭하다가 배신감이 쌓여갈 무렵 다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옛날에 잘못한 일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며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불안하고 무섭다”고 했다.

“말도 없이 가버린 게 죄송해서 전화 안 하려고 했었는데요. 사람들이 말할 기회도 안 주니까 전에 제 얘기 끝까지 다 들어준 편집장님이 생각났어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 참 인색한 시대다. 업무가 바쁘거나 주위에 말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까? 혹시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의 기준이 화자(話者)의 배경에 있는 것은 아닐까?

부끄럽게도 내가 그랬다. 이전 직장에서 보도자료 설명하려는 전화가 쇄도하면 늘 ‘큰’ 출입처의 전화만 내용까지 듣곤 했다. 나머지는 “메일로 확인할게요”라고 잘랐다.

지난날 내가 뿌린 것을 이제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내 일터는 홈리스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다. 잡지를 만들어서, 일하고 싶지만 일자리 구하기가 힘든 이들이 ‘잡지판매원’으로 일하게 돕는다. 거리에서 파는 만큼 시선을 끄는 게 중요하다. 한 권을 만들 때마다 유명인사를 섭외하기 위해 수십 통씩 전화를 거는 이유다. 전화를 걸면 “제안서를 보내 달라”는 곳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빅이슈”라고 운을 떼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 용건을 말하기는커녕 잡지를 설명할 시간도 못 얻는다. 전화 초반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라고 퇴로를 막아놓아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4년 6개월째 책을 내고 있지만 빅이슈는 여전히 생소한 잡지라서 그럴 것이다.

무명이 이렇게 서럽다면, ‘전과자’는 오죽할까. 그날 “말 할 기회를 안 준다”고 하소연하는 그 판매원의 전화를 끝까지 듣고 있었다. 과거의 전과가 발목 잡는 상황을 설명하는 그와의 통화는 저녁밥 메뉴를 이야기하도록 계속됐고 어느덧 나도 내 신세 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이 들을 뿐 서로 위로나 조언은 할 줄도 몰랐다. 그렇게 수다를 떨었는데도, 이튿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할 말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틀 전 그가 전화 통화 중에 말했다. “저 병원에 가서 수술 받을래요. 예전에도 계속 그랬고,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는데요. 정말 잘해보고 싶어요.”

물론 남의 말 들어주는 게 쉬운 건 아니다. 거짓말쟁이도 많아서, 화자의 배경을 안 따지고 이야기 듣는 건 더 어렵다. 하지만 귀를 여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일이 아닐까? 내가 귀 막았던 보도자료에 어떤 기발한 아이템이 있었을지 누가 알까. 하소연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용기를 찾은 그가 훗날 어떤 사람이 될지 또 누가 알겠는가.

이영민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빅이슈#홈리스#무명#전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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