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겨울 해수욕장 작은 파출소… 그곳에서 ‘마술같은 희망’을 엿봅니다
더보기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겨울 해수욕장 작은 파출소… 그곳에서 ‘마술같은 희망’을 엿봅니다

박훈상기자 입력 2015-01-31 03:00수정 2015-01-31 03:00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김경주 지음/159쪽·9500원·열림원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를 쓴 김경주 시인
2004년 겨울, 서울 신촌로터리 홍익문고 앞 건널목에 당시 대학생이던 김경주 시인(39·사진)이 있었다. 파란불이 켜지자 하반신에 검은색 고무 튜브를 단 사내가 바닥을 기며 건너는 모습이 시인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가 절반쯤 건넜을 때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사내의 손을 밟고 서둘러 건넜다. 홀로 남은 사내는 움직이는 차를 피해 중앙선 위에 몸을 엎드렸다. 순간 하늘에서 눈이 내렸고 사내는 멍하니 그 눈을 보았다. 고무 튜브 아래로 검은 물이 흘렀다. 겁을 먹은 탓일까. 소변이었다.

김 시인은 11년 전 목격한 사내의 이야기를 시극(詩劇)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로 풀어냈다. 제목은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 중 배우 장만위의 마지막 대사에서 따왔다. 왕 감독의 이별, 어긋남의 정서가 시인의 시극에도 담겼다.


시극을 출간한 김 시인을 28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멀티프로젝트홀 무대에서 만났다. 그는 래퍼 엠씨 메타, 김봉현과 함께 결성한 ‘포에틱 저스티스’의 포에트리 슬램(Poetry Slam·낭독용 시를 래핑으로 낭독) 공연 준비로 분주했다.

주요기사

“도대체 누가 사내를 인도로 데려다 줄까 궁금했어요. 사회의 어두운 면에만 주목했다면 앵벌이 조직이 떠올랐겠지만 전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사내에게 아내가 있어 그 아내가 업어주었다면…. 그런데 그런 아내를 업어주지 못하는 사내 마음은 어떨까. ‘업힌다’는 행위가 갖고 있는 곰살맞고 살가운 느낌을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시극의 공간은 겨울이 돼 문을 닫은 해수욕장의 작은 파출소다. 검은 지느러미 같은 고무튜브를 단 ‘김 씨’가 죽기 위해 눈이 쏟아지는 바다로 기어가고 있다. 김 씨를 목격한 파출소 직원이 김 씨를 업고 파출소로 온다. 경찰은 김 씨를 살리려 애쓰고 김 씨는 죽으려 애쓴다. 시적인 대화가 오가며 서로의 상처가 보듬어진다. 경찰에겐 자폐아인 아들을 잃은 슬픔, 김 씨에겐 아내에게 버림받은 아픔이 있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파출소 직원) “어둠 속에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조금만 있자… 하는 거요.”(김 씨)

극은 환상적인 결말로 맺어진다. 파출소 직원의 숨진 아들과 김 씨의 가출한 아내가 파출소에 찾아온다. 이런 ‘마술적 사실주의’의 형식을 택한 데 대해 김 시인은 “리얼리티로 풀어내면 소외된 자에 대한 동정으로 읽히기 쉬울 것 같았다”고 밝혔다. 낮은 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아닌,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 시극은 오세혁 씨가 연출을 맡아 5월 무대에 오른다. 공연 제목은 그가 초고 제목으로 정했던, 대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그런 말 말어’다. 시인은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말이다.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야, 희망이 남아 있어’를 일러주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김경주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