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열정페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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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들도 정당한 대가를 바란다. 청년들이 ‘최저임금을 지키라’며 시위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을’들도 정당한 대가를 바란다. 청년들이 ‘최저임금을 지키라’며 시위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10년 가을은 유난히 추웠다.

‘고시낭인’이 되어 돌아온 내겐 껍데기 화려한 학벌만 남아 있었다. 입학할 땐 모두의 부러움을 샀는데 이제 학벌은 초라한 내 신세를 더 선명하게 보여 주는 흰 도화지가 돼 버렸다. 문학사 복수학위 2장을 가지고 갈 만한 기업은 거의 없었다. 고시 공부 하느라 동아리도, 공모전 도전도 하지 않았기에 ‘스펙’이랄 것도 없었다.

그때 문을 두드린 곳이 책을 편집하는 작은 회사였다. 이곳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인턴’을 해야 ‘취직’을 할 수 있다니 어쩔 수 없었다. “학교는 좋은데 대학 때 한 게 없네?”라며 고시 패잔병의 마음을 후비던 채용관은 “월급은 없고 밥은 맛있는 거 사 줄게. 어차피 인턴 해야 좋은 회사도 갈 거 아냐?”라고 말했다. 스펙 한 줄이라도 추가해야 하는 구직자의 절박함을 회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회사를 빠져나온 뒤 구겨진 자존심을 부여잡고 눈물을 훔친 기억이 난다.

5년 전 필자의 경험담은 지금 많은 대학생이 겪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울려 퍼지는 ‘열정페이’ 곡(哭)소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5년 전만 해도 대학생들 대부분이 ‘열정페이 받고 인턴하기’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는데 최근에는 이것이 새삼 문제가 되고 있다.

무급 혹은 무급에 가까운 소정의 보상만 제공하는 회사들은 말한다. 업계에서 인정받는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자체가 당신들에게 스펙이 될 것이고 이곳의 유능한 인재들과 일하며 안목과 실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이것이 열정페이다.

이 문제는 한 누리꾼이 자신의 SNS에 올린 편의점 구인광고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편의점 주인은 최저 시급도 안 되는 근무 조건을 제시하며 “돈 벌려고 알바 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고 적어 공분을 샀다. 여기에 패션디자이너 이상봉 씨가 10만∼30만 원의 턱없는 월급을 제시하며 인턴을 고용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더 확산됐다.

여기저기서 열정페이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기업들의 태도는 여전하다. 2월 8일 입사지원을 마감하는 한 유명 명품 업체의 태도가 그것을 보여 준다. 프랑스에 모기업을 둔 이 업체는 한국지사 인턴을 뽑으면서 “별도의 월급은 없으며 식사비는 30만 원 지급한다”고 밝혔다.

열정페이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대가 지불’에 대해 무딘 우리의 민낯을 보여 준다. 사용자는 젊은 인력의 노동력에 합당한 대가 지불을 피한다. 채용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로서 내가 가진 가치와 그동안 쌓은 실력에 대한 보상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자존감을 버리고 기업에 ‘간택’되길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가 열정페이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청년들의 반항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동안 ‘경험이 곧 자산’이라는 생각으로 박봉 혹은 무급에도 열심히 일했던 청년들이 악덕 기업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간택되어야만 살아남는 ‘을’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나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겠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SNS를 중심으로 청년들의 외침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여전히 기성세대 중에선 “공장 가서 기름 때 묻히는 건 싫고, 폼 나는 직장 다닌다고 자랑하고 싶으니 돈 못 받아도 그런 데서 일하려는 거 아니야?”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든 청년들의 마음을 방송작가 겸 방송인 유병재 씨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젊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어도 젊은이는 헐값에 살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김수연 정책사회부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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